항목 ID | GC40201425 |
---|---|
영어공식명칭 | Buinsa Temple and Chojo-Taejanggyong(The First Tripitaka Koreana)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로 967-28[신무동 356-1]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손경희 |
부인사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로 967-28[신무동 356-1]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에 있는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판각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었던 사찰.
[개설]
부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부인사(符印寺) 또는 부인사(夫人寺)라고도 일컬어진다. 부인사지(符仁寺址)는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인사 관련 자료집으로는 『부인사의 역사와 문화』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하대에 세워진 팔공산의 3대 명찰 중 하나, 부인사]
부인사는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로부터 선덕묘(善德廟)라는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인사가 오래된 사찰이라는 것은 부인사를 부르는 다양한 한자 이름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부인사는 ‘부인사(夫人寺)’, ‘부인사(夫仁寺)’, ‘부인사(符仁寺)’, ‘부인산사(夫人山寺)’ 등 다양하게 불리는데, 이것은 부인사의 창건 설화나 부인사가 위치한 곳과 상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86년에 경북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한 『부인사 지표조사보고서(夫人寺 地表調査報告書)』에 의하면, 채집된 기와 가운데 고려시대의 “부인(夫人)” 명(銘)이 있는 평기와 몇 점이 발견된 것으로 봐, 고려시대에는 부인사(夫人寺)’라고 불렸던 것 같다.
부인사는 대구광역시의 진산인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신라시대부터 존재한 고찰로 오늘날까지 법등이 이어지고 있으며, 동화사와 함께 팔공산을 대표하는 사찰로서 중요하다. 부인사 현재 건물은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400m에 위치한 암자 터에다 1930년대 초에 비구니 허상득(許相得)이 중창했다. 1991년 선덕묘를 선덕여왕 숭모전으로 좀 더 크게 옮겨지었고, 「선덕여왕 진영」을 새로 조성하였다. 「선덕여왕 진영」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이 도둑을 맞고 1978년 다시 그렸다. 부인사는 당우로는 석가모니불상·아미타불상·관세음보살상을 모신 대웅전, 「선덕여왕 진영」을 모신 선덕여왕 숭모전과 종각·누각, 2동의 요사채가 있다. 선덕여왕 숭모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일부 남았던 것을 1930년대 초에 중건한 것이며, 음력 3월 보름에는 이곳에서 동네 유지들과 승려가 함께 모여 선덕제(善德祭)를 지내고 있다. 현존하는 문화재로는 쌍탑(雙塔)을 비롯하여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석등과 당간지주·석등대석(石燈臺石)·배례석(拜禮石)·마애여래좌상 등이 있다. 최근까지 무너져 있었던 쌍탑 중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서탑은 1966년에 복원하였다. 신라 말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보이고 있다. 서탑 옆에는 50㎝가량 머리 없는 석불이 있는데, 1978년까지는 여러 기가 있었으나 1979년에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대웅전 앞에는 2기 석등이 있는데, 1기는 가운데가 금이 갔으나 완전한 형태이다. 이보다 작은 석등은 밑받침만 남아 있다. 이 석등 앞에는 돌 사면에 높이 약 70㎝의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옆에 배례석이 있다. 절 부근의 포도밭 속에는 신라 때의 작품인 당간지주가 있어 전성기의 절 영역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바위에 감실을 파고 조각한 마애여래좌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특이한 마애불이다. 이밖에도 초석과 축대에 남아 있는 화려한 장대석(長臺石)이 산재해 있다. 이런 수많은 문화재는 바로 부인사가 통일신라 하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상당한 규모 사찰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조계종 제9교구 동화사의 말사의 하나로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화엄종의 사찰이었다.
[부인사와 초조대장경]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은 일반적으로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 때 조성하기 시작하였고,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에 의해 소실되기 전까지 부인사(符仁寺)에 소장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부인사가 「초조대장경」의 봉안처가 된 것은, 경전을 중시하는 화엄종의 대찰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을 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측면,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이자 김유신의 처가 되었던 지소부인의 복을 비는 원당이었다는 점이다. 부인사 절 안에 선덕여왕의 묘가 있고 그 안에 「선덕여왕 진영」이 모셔져 있다. 불교가 흥왕하였던 신라와 고려 때에는 약 2,000명의 승려가 수도하였다고 한다. 고려 현종 때부터 문종에 이르기까지 부인사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완성했던 「초조대장경」의 판각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초조대장경」은 몽골의 침입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지고, 현재 일본 교토[京都]의 남례사(南禮寺)에 1,715판이 전해지고 있다. 전성기에는 39개 부속 암자를 관장하였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승려들만의 승시장(僧市場)이 섰다는 구전이 전하여진다. 몽골의 침입 이후 중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중창 및 중수의 역사가 전래되지 않고 있다. 「초조대장경」은 중국 북송(北宋)의 「관판대장경(官版大藏經)」[971~983]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간행한 한역(漢譯) 대장경이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의 기록을 보면, 송나라 태조에 의해서 간행한 대장경이 991년 고려에 전래되자, 고려는 커다란 자극을 받고 대장경 간행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 993년(성종 12)부터 거란의 침략이 시작되었고 1011년에는 현종이 남쪽으로 난을 피하였으나 거란군이 송악[개성]에서 물러나지 않으므로 군신이 무상의 대원을 발하여 대장경판을 새기기로 서원한 뒤 거란군이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다. 즉 거란족이 침입하자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는 국민정신을 통합하여 외적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지키겠다는 신앙심으로 대장경판을 조성했다.
판각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011년에 시작하여 1087년까지 77년이 걸려 새겼다는 설이 있고, 1019년에서 1087년까지 69년 동안과 1011년에서 1051년까지 41년이 걸려 완성했다는 설이 있다.
물론 나름대로 근거는 있으나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 실린 「대선왕제종교장조인소(代宣王諸宗敎藏彫印疏)」에 의하면 현종 재위(1009~1031) 기간인 1011년에서 1029년경까지 북송의 관판 대장경과 같은 분량[『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수록분인 1076종 5048권]의 판각은 모두 마쳤음을 알 수 있다. 송 『신역본(新譯本)』은 그 뒤에 추가로 판각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역본(新譯本)』은 권말에 간행기록이 전혀 없고, 권자본의 형식이며 한 면에 23항(行)[줄] 14씩 배열되어 있고 장수 표시가 ‘장(丈)’으로 되어 있고 가끔 ‘폭(幅)’으로 표시 되어 있다. 그리고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에는 정교하고 뛰어난 판화가 수록되어 있다.
「초조대장경」 조조(造彫)의 내력을 보면 1011년(현종 2) 거란의 대군이 침략하므로 왕은 남쪽 나주로 피난했다. 개경은 걸안병에 의해 점령되고 불타버렸다. 이에 군신이 함께 무상대원(無上大願)을 발하여 대장경의 각성을 서원하자 곧 걸안병이 물러났다. 걸안병이 물러난 3년 후에 국태민안을 위하여 그리고 걸안병의 침략을 불력의 가피(加被)로 막기 위하여 대장경을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1020년(현종 4)에 조각하기 시작하여 1029년(현종 20)에 17년간 5,000축(軸)에 이르는 방대한 대장경판의 조각이 이루어졌다. 다음 9대 덕종(德宗), 10대 정종(靖宗)은 위 경판 경장을 봉안하는 데만 힘썼으나 11대 문종(文宗)은 즉위하자 1051년(문종 5)부터 대장경판 조각 작업을 계승하여 대왕 치세 하에 6,000여 권에 이르는 『신조대장경판(新彫大藏經版)』이 완성되었다. 이어 대각국사 의천이 편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따른 『속장경경판(續藏經經版)』의 조조를 1081년(선종 5)에 시작하여 15대 1099년(숙종 4)까지 18년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시켰다. 『속장경경판(續藏經經版)』은 1,070부, 4,857권에 이른다. 그런데 『속장경경판(續藏經經版)』은 조각 후 130여 년이 지난 1232년 24대 고종(高宗) 19년에 제2차로 침입한 몽골군에 의하여 사찰건물과 경장, 경판이 모두 불타 버렸다.
몽골의 침략으로 『초조대장경판』이 불타 버리고 난 뒤 5년에 현종 때 걸안병 퇴치의 정신에 따라 불력으로 원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국태민안을 기하고자 대장경판 재조(再彫)를 하기 시작하여 16년의 세월에 걸쳐 판수 81,686장, 6,780권을 완성했다. 이 장경판이 지금 해인사 장경각에 봉안되고 있는 바로 재조대장경판이다.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골족의 침입으로 불타 버린 뒤 현재까지 전래된 것이 거의 없다고 알려져 왔다. 그리하여 그동안 『초조대장경』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와서야 『초조대장경』은 국내에도 전래되어 성암고서박물관, 호림박물관, 호암미술관과 개인 등이 약 300여 권을 나누어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일본의 교토[京都] 난젠지(南禪寺)와 쓰시마[對馬島]에 상당량의 『초조대장경』이 보존되고 있는데, 전체 전래되고 있는 권수가 약 2,000 여권 이상으로 추정된다. 앞으로의 연구에 의해 머지않아 『초조대장경』의 성격이 제대로 밝혀질 수 있다. 이 『초조대장경』은 그동안 북송의 『관판대장경』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 비교해 보면 그 체제가 다르며, 오히려 북송의 『관판대장경』보다 글씨가 좋고 정교하게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조대장경』은 우리의 독자적인 판각으로 당시의 뛰어난 목판인쇄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부인사 정비계획]
부인사 주지 종진은 2007년부터 부인사와 그 유허지를 정비하고자 계획하고, 대구광역시청 관계자와 각계 관련 전공자들로부터 자문을 받아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자 발원하였다. 2008년 4월,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와 본격적인 논의를 거쳐 현재 부인사 도량을 ‘수행 공간’으로, 남쪽에 방대하게 펼쳐진 부인사지를 ‘역사 공간’으로 이원화하여 각각 별도 정비방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2009년에 부인사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부인사와 부인사지에 대한 문헌과 고고자료를 집성한 자료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