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2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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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공식명칭 | Goryeo Dynasty |
이칭/별칭 | 고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
[행정구역]
고려 현종 때 5도 양계 체계가 확립되면서 고려 전기 행정 구역은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다. 지방에는 지방관을 파견하는 주현(主縣),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는 속현(屬縣)으로 구분하였다. 주현으로는 경(京), 도호부(都護府), 목(牧) 등의 계수관(界首官) 지역과 현(縣)이 있었다. 주현의 관할에 속하는 지방행정구역으로는 속군, 속현 이외에 향·소·부곡·진·역 등 부곡제(部曲制) 지역이 있었다.
고려시대 현 대구광역시 동구 일대에 있었던 지방행정구역은 해안현(解顏縣)[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 일대], 안심소(安心所)[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안심동 일대] 등이다. 해안현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치성화현(雉省火縣) 또는 미리현(美里縣)라고 불렸다. 신라는 경산 일대에 있었던 소국 압량국(押梁國)[혹은 압독국(押督國)]을 정복하고, 이곳에 압량군(押梁郡)을 설치했다. 이후 505년(지증왕 6)에는 주(州)·군(郡)·현(縣)제가 시행되면서, 압량군에 치성화현, 마진량현, 노사화현 3영현을 두었다. 이때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쪽 일대를 치성화현(雉省火縣)으로 편제하였다. 통일신라 이후 757년(경덕왕 16) 한화정책(漢化政策)의 영향으로 지방행정구역의 명칭이 변화되었다. 이때 압량군은 장산군(獐山郡)으로, 치성화현은 해안현(解顏縣)으로 바뀌었다. 해안현은 고려시대에 그대로 유지되었다. 고려 현종 9(1018년)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해안현은 장산군에서 동경유수관의 속읍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감무가 설치가 되었으며, 수성군의 감무가 그 직을 겸임하였다.
안심소(安心所)는 공업품을 생산하던 특수행정구역이다.
조선 건국 이후 1394년(태조 3) 경상도 관찰사 민개(閔開)가 도평의사사를 통해 계(啓)를 올려 경상도 지역 행정구역의 위계를 변화시켰다. 이때 현 대구광역시 일대에서는 안심소(安心所)는 하양(河陽), 수성(守城)은 대구(大丘)로 소속을 바뀌었다.
해안현과 안심소에 있었던 대표적 성씨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해안현의 성(姓)은 모(牟), 백(白), 하(河), 신(申), 정(丁), 안심소(安心所)의 성(姓)은 전(全)·신(申)·김(金)·박(朴)·허(許)·노(魯)가 있었다.
[공산전투]
견훤이 공식적으로 900년 완산주(完山州)[지금 전라북도 전주시 일대]에서 후백제를, 궁예가 901년 송악(松嶽)[지금 황해도 개성 일대]에서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라는 삼국 체제는 918년 왕건이 후고구려를 없애고 고려를 건국하면서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927년(태조 10) 견훤이 신라의 수도 경주를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를 경순왕에 올린 사건은 후백제와 고려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고려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하는데 큰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후삼국통일의 주도권도 후백제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한편, 견훤이 경주를 공격할 때 왕건이 보낸 강공훤이 왕건의 기대만큼 효율적으로 견훤을 막아내지 못했다. 따라서 왕건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바로 공산전투[일명 공산 동수전투]이다.
왕건은 5천의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견훤이 후백제로 돌아가는 길목인 공산으로 향했다. 고려군은 팔공산 서쪽 방면에서 동쪽 방면으로 진행했다. 일반적으로 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의 무태(無怠)에서 화천(桐華川)을 따라 북동쪽으로 진행하면서, 연경동(硏經洞), 지묘동, 미대동을 거쳐 팔공산 동화사 아래로 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군과 후백제군의 첫 접전지는 태조지(太祖旨)이다. 태조지는 대체로 오늘날 경상북도 영천시 은해사 입구로 추정되고 있다. 태조지 전투에서 패한 고려군은 후퇴를 해 현재 서변천(西邊川)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살내 일대에서 군사를 재정비했다. 이 때 왕건이 이끈 군사는 먼저 파견된 강공훤이 이끈 선발대와 합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군이 후백제군과 다시 전투를 벌였고 파군재에서 동화사로 올라가는 길과 파계사로 올라가는 길 사이에 위치한 지묘동의 왕산 아래 산기슭으로 추정되는 미리사(美利寺) 앞까지 진출했다. 미리사 일대에서 펼쳐진 전투는 공수 전투 과정 전체에서 가장 치열했고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전력을 다해 치른 전투이다. 결국 고려군은 파군재에서 후백제군에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우선, 고려 개국 공신으로 왕건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숭겸이 왕의 갑옷을 입고 왕건으로 행세해 후백제군을 속여 왕건을 피신시키고 대신 죽었다. 고려 장수 김락은 자신의 말에 왕건을 태우고 피신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또한 전의갑, 전이갑 형제도 전투 도중 전사했다. 이렇듯 후백제군에 비해 공산 동수에 먼저 도착해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음에도 고려군은 공산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공산전투 이후 고려와 후백제의 대결은 더욱 첨예화되었지만, 후삼국사 전체로 보면 통일전쟁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에는 공산전투와 관련된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공산전투 관련 지명으로는 파군재, 독좌암, 왕산, 안심, 해안, 반야월, 백안, 연경, 살내 등이 있고, 왕건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의 시신을 찾은 자리에 순절단(殉節壇)과 지묘사(智妙寺)가 세워졌다. 그리고 1120년(예종 15)에는 신숭겸과 김락 장군을 추모하는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가 지어졌다.
[무신정권의 수립과 동화사 및 부인사 승려의 대응]
무신정권의 성립은 1170년(명종 원년)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 등에 의한 무신정변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경대승, 이의민이 차례로 권력을 차지하고, 1196년(명종 26)에 최충헌이 집권하게 된다. 최충헌은 집권 이후 주로 선종세력과 결탁해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교종세력과의 마찰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뿐 아니라 지방에 있는 교종 승려들도 적극적으로 최충헌의 정책에 저항했다. 현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 있었던 부인사와 동화사도 마찬가지이다. 부인사와 동화사는 약 두 차례에 걸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1202년(신종 5) 10월 부인사와 동화사 승려들은 두 세력과 결합해 공격했다. 우선 영주별초군과 갈등 관계에 있던 경주별초군, 운문[지금 경상북도 청도군 일대] 김사미의 난에 가담했던 잔존 세력들[『고려사』에는 운문반적(雲門反賊)]과 연합해 영주별초군을 공격했다. 즉 부인사와 동화사 승려들은 최충헌 정권에 반발하고 있던 세력과 규합해 공격을 했다. 최충헌은 군사를 보내 경주별초군과 부인사와 동화사 승려를 토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결국 영주의 이극인(李克仁)과의 전투에서 패했다. 그렇지만 1203년(신종 6) 부인사 승려들이 다시 한번 공격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경상북도 영주지역 부석사 승려들과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귀양을 갔다. 부인사, 동화사 등 사원 세력의 반란은 무신정권의 성립으로 불교를 보호하여 오던 왕실과 문신 귀족이 무력화 내지 몰락한 것, 교종 대신 선종 세력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위기감이 고조된 상태에서 불교 세력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발생했다.
[무신집권기 몽골의 침입과 대구 동구 지역의 대응]
무신집권기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받게 된다. 몽골은 1231년(고종 18)부터 1258년(고종 45)까지 약 30년간에 걸쳐 여섯 차례 고려에 침입하였다.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은 1232년, 1238년, 1254년 세 차례 몽골의 침입으로, 문화재 소실뿐 아니라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몽골의 제2차 침입은 1232년(고종 19) 의주를 시작으로 해 마지막 종착지가 대구였다. 이때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소실되었다.
몽골의 제3차 침입은 1235년(고종 22)부터 1239년(고종 26)까지 약 5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235년에는 상주, 안동, 경주 등 경북 일대, 1236년부터 1237년까지는 전주, 부안 등 전라도 일대를 주로 공격했기 때문에, 대구광역시 동구 일대는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1238년 대구를 거쳐 경주를 공격해 윤 4월 황룡사탑을 불태웠다. 1238년 경주 공격 당시 대구광역시 동구 일대에 살았던 주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몽골의 제6차 침입은 1254년(고종 41)부터 1259년(고종 46)까지 이루어졌다. 이때 해안[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 일대]·대구·수성[지금 대구광역시 수성구 일대] 주민들은 공산성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공산성 주둔이 길어지면서 백성들은 식량과 식수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이 시기 굶어 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골짜기를 메웠다고 한다. 주민들은 고통은 1255년에도 계속되어 공산성[팔공산에 있었던 성] 부근에 있는 해안·대구·수성의 많은 주민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1254년 몽골군은 대구지방을 거쳐 남진을 계속, 12월 초 단계현(丹溪懸)[지금 경상남도 산청군]과 진주(晋州)에까지 내려갔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