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1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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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祭禮 |
영어공식명칭 | Ancestral Ritual Formalities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손경희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 이루어진 제례에 관한 의례.
[개설]
제례 는 조상숭배에 대한 관념이 실제생활에서 체계화된 것이다. 특히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집안마다 다소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 제사에는 명절에 지내는 차례와 조상이 돌아가신 날 지내는 기제사, 기제사에서 모시지 않는 조상의 묘소에 가서 지내는 묘사 등이 있다.
[연원 및 변천]
예로부터 한국에서는 천지·일월성신을 비롯해 풍사·우사·사직·산악·강천, 선왕·선조·선사를 대상으로 제사를 지내왔다. 그러나 지금은 제사라고 하면, 선조에 대한 의례를 가리킨다. 이러한 변화의 분기점은 인간이 바로 조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조상숭배의 관념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때이다. 구체적으로는 고려 말엽 유교가 정착하기 시작하고 불교의 세력이 차차 쇠퇴한 때로 보인다. 유교는 삼국시대부터 한문이라는 표현수단과 함께 우리나라에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 특히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유학의 세력이 확산되고 이와 더불어 유입된 주자의 『가례(家禮)』는 조상숭배의 관념을 보편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통치이념으로 채택됨에 따라 주자의 『가례』는 바로 그 실천윤리로서 국가적으로 권장되었다. 『가례』는 선조가 사람과 가족의 근본이므로 근본에 돌아가자는 보본반시(報本反始)[선조의 은혜에 보답함]의 사상을 담고 있는 가범서(家範書)였다. 조선시대에는 『가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는 한편, 지배층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유교식 제례가 점진적으로 보급·확산되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제례의 관습은 사회구조의 변동과 그에 따른 생활환경과 양식의 변화, 의례간소화운동 등으로 상당히 변모해 왔다. 『가례』의 준칙이 지역과 사회적 계층을 초월해 거의 보편화된 듯이 보이는 현대에 있어서도 제례의 양상은 지역과 경제적 조건 등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절차]
차례는 설과 추석에만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묘사는 대부분 음력 10월에 조상의 묘에 가서 직접 행한다. 기제사의 경우 4대 봉사를 하는 집안도 있었다. 대수를 줄인 경우에는 2대 봉사를 하는 집도 있었다.
1. 차례
설 과 추석 등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 혹은 차사라고 한다. 이때는 기제사로 모시는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불천위[덕망이 높고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인물을 영원히 사당(祠堂)에 모시도록 국가가 허가한 신위]를 모시는 집안의 경우 불천위에도 차례를 지낸다. 차례를 지내는 곳은 사당이 있는 곳은 사당에서 지내며, 그렇지 않으면 대청이나 방에서 지낸다.
2. 기제사
기제사를 지낼 때는 입제일과 파제일이 나눠진다. 살아계셨던 날이 입제일이며 다음 날을 파제일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기제사는 입제일 밤 12시가 넘어서 지내며 때로는 파제일의 새벽에 지내는 경우도 있다. 기제사에서 4대 봉사를 하는 경우가 많이 조사되었으나 점차 부모와 조부모까지 2대 봉사를 하는 것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의 경주최씨 종택에서는 기제사로는 4대 봉사를 하며, 불천위로 2대를 더 모시고 있다. 제사는 모시는 날은 조상이 돌아가신 날로 파제일에 모신다. 1980년대까지는 새벽에 닭이 울면 지냈다. 요즘에는 파제일 초저녁에 모신다. 제사를 새벽에 지내던 시절에는 제사를 지낼 때 닭이 울면 ‘헛제사’ 지낸다고 하면서 좋지 않게 여겼다. 한편, 제물의 종류와 진설하는 기준은 백불암 최흥원의 뜻에 따른다. 검소하면서도 정결하게 장만하고 그 시기에 생산되는 과일을 쓰며 밤과 대추는 잘 갈무리하여 항상 쓰도록 한다. 또한 적과 전, 고기, 닭을 하나의 제기에 담아 쓰고 과일은 4개만 올린다고 한다.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의 양태열 씨 댁의 경우를 보면 기제 올리는 시간은 자정 12~1시 사이로 제관은 도포에 유건을 쓴다. 젊은이들의 경우는 도포와 유건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양복차림으로 참제를 한다. 제사를 올리기 전에 과거에는 3일~7일 전부터 부정을 타는 일을 보지도 않고 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축문은 집안에서 내려오는 것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신위(神位)는 위패가 없기 때문에 지방으로 대신하고 있다. 제사절차를 보면 진설 후 분향 강신을 하는데 분향을 하는 것은 주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다음으로 강신을 하고 참신재배(叅神再拜)한다. 주인이 초헌관이 되어 초헌을 올리고 독축(讀祝)한다. 아헌(亞獻)은 주부가 올린다. 종헌은 집안의 최고 연장자가 올린다. 다음 국궁을 하여 조상이 술을 마시게 기다린다. 그다음으로 진다(進茶)를 하고 잠시 후에 유식(侑食)을 하며 “잡수시오”하고 권유한다. 유식 시에는 참제자 일동이 꿇어앉아 5분정도 기다린다. 유식 후에 수저를 거두고 사신(辭神)하는데, 이때 재배를 한다. 큰제사에는 사신 전에 초헌관이 음복을 하나 보통 기제사는 음복을 철상 후에 한다. 여성도 참제하는데 사배(四拜)를 했다. 그리고 현관들은 참신재배, 헌작재배(獻酌再拜), 사신재배(辭神再拜)하며, 참제인은 참신재배, 사신재배만 하기 때문에 사배(四拜)가 된다. 음복은 가까운 이웃들에게 갚음을 한다는 의미로 집에 불러서 음복케 한다.
3. 묘제
기제사에서 모시지 않는 5대조 이상의 조상에 대해 묘소에 가서 지내는 제사를 흔히 묘사(墓祀), 묘제(墓祭), 시사(時祀)라고 한다. 묘사는 대부분의 집안에서 음력 10월에 모신다. 대개 지역의 입향조부터 자신의 5대조까지 모시는 것으로 나타났다. 묘사의 주관은 종중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참석자의 범위는 그 조상의 후손 전체이다. 참여자의 수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의 경주최씨 집안에서도 음력 10월에 묘사를 지낸다. 종가의 경우 모두 11번의 묘사를 지낸다고 한다. 묘사를 모시는 조상 별로 위토답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오는 것으로 경비를 충당한다. 묘사를 지내기 전에는 「산신축」을 읽으며 묘사를 지낼 때에도 집에서 지내는 제사와 동일하게 제기 하나에 담아서 올린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제사를 지낼 때는 문을 닫지 않고 불도 끄지 않는다. 사립문을 열어놓고 마당의 빨랫줄도 모두 걷어 놓는다. 이는 조상이 오고 가시는 데 걸림이 없으라는 의미이다.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경주최씨 종택의 제례 공간]
대구광역시 동구 옻골 마을 경주최씨 종택에는 아직도 제례 공간이 보존되고 있다. 경주최씨 종택의 살림집 동쪽에는 가묘(家廟), 별묘(別廟), 보본당(報本堂) 등의 제례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가묘는 1630년 안채와 함께 건립되었다. 현 종손의 4대조 신위와 불천위(不遷位) 최흥원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공간이다. 경주최씨 종가는 최동집과 최흥원 두 분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별묘는 최흥원이 1737년에 불천위(不遷位) 최동집을 위해 세운 건물로, 가묘 동쪽에 담을 치고 사당 출입문 위에 태극화반(太極花盤)을 올려놓았다. 보본당(報本堂)은 별묘 앞에 있는 건물로 최흥원이 입향조 최동집의 불천위 제사를 받들기 위해 세웠다. 불천위가 두 명인 점은 다른 사대부집안의 제례와 다른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