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8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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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養眞庵 |
영어공식명칭 | Yangjinam Herimitag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병선 |
건립 시기/일시 | 1743년 - 양진암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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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중창 시기/일시 | 1898년 - 양진암 중수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980년 8월 - 양진암 당우 중수 |
최초 건립지 | 양진암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산35] |
현 소재지 | 양진암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산35] |
성격 | 사찰|암자 |
창건자 | 무주대사 |
전화 | 053-982-0224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에 있는 조선시대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 소속 산내암자.
[개설]
양진암(養眞庵)은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에 있는 조선시대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산내암자이다.
[건립 경위 및 변천]
「양진암중창유공기(養眞庵重創侑功記)」에 “양진공부(養眞工夫)하고 나면 양진암이 어딘가,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서 그것이 양진공덕(養眞功德)이니라”고 한 것에서 ‘양진암’ 사명(寺名)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있다. 양진암은 조선시대 1743년(영조 19)에 무주대사(無住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1898년(광무 2)에 춘파화상(春坡和尙)이 중수하였다. 「동화사사적기(桐華寺寺蹟記)」에는 ‘무주(無住)’를 ‘撫州(무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 퇴락해 있던 가람을 1950년 초에 속리산 수정암(水晶庵)에 있던 비구니 성련(性蓮)이 이곳에 와서 가람을 정비하고 선원(禪院)을 열어 비구니 참선 도량으로 사찰의 격을 높이고, 1980년 8월에 퇴락한 당우들을 중건하였다. 1998년에는 관음전(觀音殿)을 짓고 42수(手)관음보살을 봉안했다. 같은 해인 1998년 요사인 육화당(六和堂)을 건립하였다. 2000년 2월에는 사미니 기초선원을 개원했다. 2003년에 미소실(微笑室)과 2005년에 선열당(禪悅堂)을 각각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활동 사항]
양진암은 비구니 참선 도량으로 일반 사찰과 같은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하안거(夏安居)나 동안거(冬安居) 결제(結制)가 있을 경우 30여 명 비구니가 양진암에서 참선 수행을 한다고 한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양진암은 동화사 서쪽 주차장에서 매점 뒤로 난 길을 따라 서북쪽으로 800m쯤 가면 있다. 양진암 입구에는 ‘팔공산법보전불적답공덕비(八公山法寶殿佛積畓功德碑)’와 「동화사양진암중수비기(桐華寺養眞庵重修碑記)」가 세워져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높은 축대 위에 관음전(觀音殿)이 있다. 관음전은 2층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팔작지붕으로 1층은 공양간, 2층은 법당이다. 관음전 공간 북쪽으로는 남쪽을 정면으로 하는 육화당(六和堂)이 있는데, 현재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2층으로 된 육화당은 정면 8칸, 측면 1칸 주심포식 팔작지붕으로 ‘여섯 가지 발원으로 세워진 건물’이라는 뜻이다. 육화당 우측 출입구로 올라가면 양진암의 중심 사역(寺域)이 나온다.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그 서쪽에 방향보다 지형에 맞게 건립한 정면 4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팔작지붕인 미소실이 있고,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팔작지붕인 선열당이 가람축선에 맞게 위치한다. 탑의 북쪽에는 ‘양진선원(養眞禪院)’의 현판을 단 인법당(人法堂)이 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구조인 인법당 후면에는 한 단 높게 조성된 대지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을 한 법보전(法寶殿)과 토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