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4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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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옻골慶州崔氏百弗庵派宗家所藏典籍 |
영어공식명칭 | Documents in the Possession of the Head Family of Baekbulamfa of Gyeongju Choe Clan in Otgol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옻골로 195-5[둔산동 38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호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3년 4월 30일 - 옻골경주최씨백불암파종가소장전적,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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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옻골경주최씨백불암파종가소장전적,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
소장처 | 옻골경주최씨백불암파종가소장전적 - 대구광역시 동구 옻골로 195-5[둔산동 386] |
간행처 | 옻골경주최씨백불암파종가소장전적 - 대구광역시 동구 옻골로 195-5[둔산동 386] |
성격 | 고문서|전적 |
저자 | 최흥원 |
간행자 | 최흥원 |
권책 | 2종 664점 |
문화재 지정 번호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소재 경주최씨 백불암파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
[개설]
‘백불암’은 최흥원[1705-1786]의 호이다. 1778년(정조 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교관(敎官)이 되었고, 1782년 장악원주부·공조좌랑을 거쳐 1784년 세자익위사좌익찬(世子翊衛司左翊贊)이 되었다. 평생을 거의 대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그의 학덕을 높이 세워 사람들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 중 한분으로 추앙하였다. 백불암은 부인동을 중심으로 향약을 실시하고 유교적 이상사회를 실천하려 한 경세가 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정에서 백불암파 종가에는 많은 문서와 서책이 소장되어 있다. 그중 부인동동약은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실시되었는데 동약절목 등 그 구체적 운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백불암이 1735년 부터 51년간 써 내려간 역중일기는 18세기 후반 영남의 대표적 유학자 가정의 생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일기의 상세하고 솔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저자]
옻골경주최씨백불암파종가소장전적은 최흥원외 다수의 저자가 편찬했다.
[편찬/간행 경위]
옻골경주최씨백불암파종가소장전적은 18세기 대구광역시 대표적 가문이 사회, 경제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문서를 주고받기 위해 작성했다.
[형태/서지]
옻골경주최씨백불암파종가소장전적은 고문서와 고문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규격은 각 고문서와 전적의 양식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다.
[구성/내용]
옻골경주최씨백불암파종가소장전적에는 「부인동지」, 「부인동동약절목」, 「부인동사실」 등 부인동동약 관련자료, 백불암 최흥원이 1735년부터 51년간 배우고 듣고 느끼고 말한 것을 써 내려간 『역중일기』, 경주최씨가문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분재기와 매매문서」, 「호구단자」와 「준호구」, 소지와 관청으로 부터 받은 「완문」, 「입안」 등의 문서이다. 또 상례 때 만들어진 「집사분정기」, 「문상기」, 「시도기」 관련자료도 다수 존재한다. 또한 『논어』, 『맹자』 등 경서, 『규장전운』과 같은 음운서, 최흥원의 글을 정리한 『백불암선생문집』과 『언행록』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현재 경주최씨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옻골경주최씨백불암파종가소장전적은 조선후기 대구지역 재지사족의 존재형태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특히 『역중일기』와 부인동동약에 관한 자료 등은 그 내용이 상세하고 정확성을 갖고 있어 관찬 사료가 가진 미비점을 보완하고 나아가 해당 시대 사회, 경제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부인동동약은 100여년 넘게 유지되어 온 조선 후기 향촌사회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옻골경주최씨백불암파종가소장전적은 2003년 4월 30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