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1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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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Cultural Heritage and Significance of Palgongsan Mounta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호 |
동화사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 | |
부인사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로 967-28[신무동 356-1] | |
파계사 - 대구광역시 동구 파계로 741[중대동 7] | |
백불암고택 - 대구광역시 동구 옻골로 195-5[둔산동 386] | |
최흥원정려각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375 | |
첨백당 - 대구광역시 동구 도평로116길 192-7[평광동 979] | |
신숭겸장군유적 - 대구광역시 동구 신숭겸길 17[지묘동 526] | |
성재서당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길 120[미대동 169] | |
용수동당산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420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팔공산의 역사와 문화유산.
[개설]
팔공산이란 이름을 갖게 된 연유에 관해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후삼국시대 신숭겸과 김락 등 여덟 장군이 이 곳에서 순절했다고 해서 팔공산이 되었다는 설이다. 두번째는 여덟 고을에 걸친 산이라 하여 팔공산이 되었다는 설이다. 세번째는 원효의 제자 여덟 성인이 팔공산에서 득도함에 유래했다는 설이다. 마지막으로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에 대패한 공산전투와 유사한 일로 “중국 전진(前秦)의 왕 부견(苻堅)이 동진(東晉)과 팔공산에서 전투를 벌여 대패하였다”는 데서 따와 지명을 팔공산으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산 이름에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는 점은 바로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팔공산이 차지하는 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시대부터 민족의 명산이었던 팔공산]
예로부터 대구분지를 병풍처럼 감싸 안은 팔공산의 옛 이름은 공산(公山)이었다. 팔공산은 통일신라시대 중악(中岳)·부악(父岳) 으로 불린 명산(名山)중의 명산이요 대구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다.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 오악(五岳)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산악을 숭배하여 동쪽의 토함산[동악(東岳)], 서쪽의 계룡산[서악(西岳)], 남쪽의 지리산[남악(南岳)], 북쪽의 태백산[북악(北岳)], 중앙에 공산[중악(中岳)]을 두었다”고 한다. 즉 팔공산은 통일신라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여 국가차원에서 숭배한 신라인의 영산(靈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고려시대까지는 공산으로 불리었는데 조선 초기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공산이 팔공산이라 기록되었으므로 여말선초(麗末鮮初) 어느 시기 공산이 팔공산으로 명칭이 바뀐듯하다.
[고려와 후백제의 운명을 가른 공산전투가 벌어진 팔공산]
팔공산의 역사는 천혜의 요새답게 중요한 전투를 중심으로 역사적 흐름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신라하대 희강왕-민애왕-신무왕 대에는 4년 만에 3명의 왕이 교체될 정도로 왕위계승분쟁이 치열하였다. 희강왕을 축출한 민애왕은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청해진의 장보고 군사와 함께 나타난 김우징[후일 신무왕]과 이곳 팔공산에서 맞서 싸웠으나 대패해 시해되고 말았다. 그 후 경문왕이 민애왕을 추모하는 탑을 세웠으니 이 탑이 바로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이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보물 제741호]에는 민애왕의 행적이 잘 나타나 있음과 동시에 동화사가 신라 왕실의 원찰(願刹)이었음을 보여 준다.
고려 초에 팔공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전투가 벌어졌다. 바로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벌였던 공산전투이다. 이 공산전투는 후백제의 견훤 군사가 경주를 함락하고 경애왕을 살해한 후 복귀하다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고려 태조 왕건의 군사들과 싸운 전투이다. 공산전투에서 왕건은 대패하면서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을 잃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신숭겸 장군유적[대구시 기념물 제1호]과 팔공산 일대의 파군재, 왕산, 독좌암, 실왕리, 해안과 같은 지명은 당시 왕건의 참패와 도주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대구읍성을 점령하자 대구부사 윤현은 군관민 2천명과 함께 대구방어의 마지막 보루인 팔공산 공산성(公山城)으로 들어갔다. 대구[대구광역시]를 비롯한 인근 고을의 사대부들은 이곳 팔공산 정상부인 공산성에 모여 구국의병을 일으키기로 맹세한 후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이것이 바로 공산회맹(公山會盟)이다. 공산회맹은 두차례에 걸쳐 600여 명 의병장이 참여할 정도로 대규모 회맹이었다. 또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국 팔도의 승려들도 구국성전을 위해 승병을 일으켰다. 사명당대사는 동화사에 영남승군사령부를 두고 승군을 훈련시켰으며 공산성을 수축하고 왜군과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현재 동화사 봉서루에 걸려있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 현판과 대구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보물 제1,505호]은 당시 승병의 활약상을 느끼게 해준다.
[신라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한국 불교 문화유산의 중심지, 팔공산]
팔공산이 통일신라시대 중악(中岳)으로 자리잡으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의 성지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팔공산 동화사가 왕실의 원찰지(願刹地)로서 원탑(願塔)조성 등 융성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되었다. 대구 동화사 대웅전[보물 제1,563호],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248호], 「대구 동화사 아미타회상도」[보물 제1,610호] 등의 건축물, 석탑, 불교회화는 팔공산의 불교문화를 웅변해 준다.
이러한 흐름은 고려시대에서도 계속되어 고려 현종 대에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국가와 국민을 지키겠다는 신앙심으로 판각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판이 부인사(符仁寺)에 봉안되기도 하였다. 현재 부인사에는 부인사 석등[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2호], 부인사 서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부인사 부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가 남아 있어 우리나라 불교 석조미술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도 파계사(把溪寺)는 영조(英祖)의 원찰로서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는 등 불교의 맥을 이어왔다. 대구 파계사 원통전[보물 제1,850호]의 대구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992호]을 새로이 금칠하다가 복장유물(腹藏遺物)로 발견된 발원문에는 영조가 탱화 일천불을 희사하면서 왕실의 원찰로 삼고 왕의 도포를 복장하였다고 쓰여 있다. 또한 대소인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라는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가 있어 파계사가 왕실의 원당임을 뒷받침한다. 현재 파계사에는 「파계사 영산회상도」[보물 제1214호] 대구 파계사 원통전 수미단[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3호]등이 유존하고 있어 불교문화를 꽃 피워 온 파계사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팔공산에는 갓바위 아래의 관암사,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1호]에 인접한 관음사, 북지장사와 같은 전통사찰이 있다. 특히 북지장사 대웅전[보물 제805호]은 불교 목조건축으로는 대구에서 가장 먼저 보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외에도 팔공산에는 많은 암자가 존재한다. 양진암, 부도암, 내원암, 염불암이 잘 알려져 있는데 그중 염불암에는 동화사 염불암 청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이 있다. 동화사 염불암 청석탑은 벼루를 만드는 재료인 점판암으로 조성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특이한 형태의 석탑이다. 우리나라에서 청석탑이 실제 조사된 것은 전국적으로 10기가 넘지 않을 정도이므로 팔공산에서도 보기 드문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팔공산 산중의 곳곳에는 불교미술의 진수를 느끼게 하는 많은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팔공산마애약사여래좌상(八公山磨崖藥師如來坐像)[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念佛庵磨崖如來坐像및菩薩坐像)[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 신무동 마애불좌상(新武洞磨崖佛坐像)[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八公山東峰石造藥師如來立像)[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신무동 삼성암지 마애약사여래입상(新武洞三省庵址磨崖藥師如來立像)[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호], 송정동 석불입상(松亭洞石佛立像)[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2호]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불교 역사와 함께 내려온 아름다운 불교미술을 보면, 팔공산은 마치 불교예술의 정수를 한자리에 모아 놓은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팔공산 제천단과 마을 당산]
고대 한국에서 최고의 신은 천신(天神)이었다. 천신의 신분으로 하강한 신이 산신(山神)이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예부터 산신을 숭배했다. 팔공산은 신라시대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산신에 제사지내는 성산영악(聖山靈岳)으로 유명했다. 신라시대에는 산악을 숭배하여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공산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중악의 제사는 중악의 산신에 지내는 제와 산 꼭대기의 제천단에서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겸하였다. 고려 문신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는 무신정권 때 경주, 청도, 대구 등에서 일어난 민란을 토벌하기 위해 팔공산 신(神)인 공산대왕에게 올렸던 제문이 남아 있기도 하다. 현재 팔공산 정상인 비로봉에는 제천단이 있다. 돌을 쌓아 원형으로 만든 이 단이 신라시대 이래로 사용된 제천단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오늘날에도 많은 지역민들이 찾고 있다.
국가체제의 산신 숭배와 달리 민간에는 마을단위로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인 당산(堂山)이 있었다. 대체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공동으로 지내는 당산제는 매년 음력 정월에 지냈다. 당제와 함께 어우러진 당굿을 통해 마을사람들은 새해의 마음가짐을 정성스럽게 하고 공동체정신을 다지기도 하였다. 팔공산에는 용수동당산[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 제4호], 송정동당산, 도학동당산, 중대동당산이 있다.
[조선시대 대구 지역 유학의 산실, 팔공산]
대구광역시는 조선시대 경상도의 중심도시였으며 영남사림과 유교문화의 요람이었다. 팔공산과 금호강의 수려한 자연환경은 전통건축물의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같은 역사적,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팔공산 일대에는 주택, 서당, 재사, 누정, 사묘 등 다종다양한 건물이 축조되었다. 지정된 문화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팔공산 남록에는 대암 최동집, 백불암 최흥원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수많은 전통가옥을 지은 옻골마을이 있다. 대구 백불암 고택(大邱 百弗庵 古宅)[국가민속문화재 제261호]에는 안채, 사랑채, 보본당, 가묘와 별묘, 대문채와 고방채가 잘 보존되어 있다. 대구 백불암 고택은 대구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주택과 생활양식 연구에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고택의 공간 구성에 유학사상과 음양사상을 잘 표현하였다. 최흥원 정려각(崔興遠旌閭閣)[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0호]은 마을 어귀에 있는데 영남삼로 중 한 분이며 「부인동동약」을 실시한 백불암 최흥원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각이다. 최흥원 정려각은 정조 임금의 명에 의해 세웠다고 한다. 이외 옻골마을에는 수구당(數咎堂)[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1호], 동계정(東溪亭)[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5호], 대구 옻골마을 옛 담장[등록문화재 제266호]이 있다. 특히 대구 옻골마을 옛 담장은 흙에 돌을 넣은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는데 돌담길은 대부분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어 질서 정연한 느낌을 준다. 전통가옥과 어우러진 돌담과 그 길은 마을과 잘 어우러져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팔공산 초입부인 불로동 동쪽으로 들어가면 평광동이 있다. 평광동 입구에는 노거수와 함께 효자강순항정려각(孝子姜順恒旌閭閣)[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5호]이 있다. 강순항[1745~1830]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호랑이까지 감동케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올 정도로 이름이 난 효자였다. 나라에서는 효행을 칭찬하고 정려(旌閭)를 내려 숭정대부 행동지중추부사(崇政大夫 行同知中樞府事)에 임명했다. 마을 가장 안쪽에는 첨백당(瞻栢堂)[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3호]이 있다. 첨백당은 효자로 이름난 우효중의 효행을 널리 알리고 조선말 벼슬도 버린 채 기울어가는 국운을 안타까워하던 우명식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 첨백당은 넓은 앞마당과 배후의 야산에 의지하여 동향으로 배치되었는데 앞마당의 느티나무와 뒷동산의 대나무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파군재를 지나 지묘동에 가면 왕산(王山)을 배경으로 신숭겸장군 유적이 있다. 927년(태조 10) 팔공산 동수 일대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공산전투를 벌였는데, 공산전투에서 참패한 태조 왕건은 후백제 군사에게 포위돼 생명이 위태로웠으나 왕건의 옷을 대신해 바꿔 입고 순절한 신숭겸 장군 덕분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왕건은 신숭겸 장군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신숭겸이 전사한 자리에 지묘사를 세우고 명복을 빌었다. 이후 1607년(선조 40)에 경상도관찰사 유영순과 영남유림들이 뜻을 모아 폐사된 지묘사의 자리에 표충사, 표충단, 충열비를 건립하였다. 현재는 외삼문, 동재, 서재, 표충재, 비각, 내삼문, 표충사가 있으며 그 밖에 홍살문, 표충단, 순절비각, 고려장절 신공 순절지지비, 상절당이 있다.
신숭겸 장군 유적을 지나 팔공산 터널을 통과하면 넓은 들과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이 미대동이다. 미대동 안쪽으로 들어가면 울창한 숲속에 성재서당(盛才書堂)[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이 있다. 성재서당은 인조 대의 선비 양전헌 채명보가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으로 귀향하여 성재정을 짓고 모당 손처눌, 대암 최동집 등과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라 전한다. 세월이 흘러 정자가 퇴락하자 증손 채상정이 중수하여 강학의 장소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이것이 후일 성재서당으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팔공산 미대동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서 싸운 의병의 전통을 이어 일제강점기에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대구에서는 3월 8일에서 4월 2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불교 중앙 학림 학생인 윤학조(尹學祚)는 3월 1일 만세 운동에 참가한 후 고향인 공산면 진인동으로 내려왔다. 3월 23일 동화사 학림 학생이었던 권청학 등을 만나 만세 운동을 권고하고 공산면 백안동 백안시장에서 궐기를 계획하였으나 3월 30일 대구부 덕산정 시장[현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 남문시장]에서 단행하였다. 한편 미대동의 채학기(蔡鶴基)는 대구 만세 시위 때 배부된 「독립선언서」를 보고 격문을 돌려 궐기를 호소하였다. 4월 26일과 4월 28일 채학기, 채봉식, 채희각, 채경식, 채명원, 채송대, 채재갑 등의 청년들이 주도하여 미대동의 여봉산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