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1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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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師百弗庵先生言行緫錄 |
영어공식명칭 | Speech and behavior collection of Baebulam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39년 - 「선사백불암선생언행총록」최흥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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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12년 - 「선사백불암선생언행총록」최흥벽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908년 - 「선사백불암선생언행총록」간행 |
배경 지역 | 「선사백불암선생언행총록」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성격 | 전장|행장 |
작가 | 최흥벽 |
[정의]
조선 후기의 학자 최흥벽이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의 집안 형님인 최흥원을 위해 지은 언행 총록.
[개설]
최흥원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태초(太初)·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다. 최흥원은 대대로 달성의 칠계[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살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최흥원은 1739년(영조 15)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해 「부인동규(夫仁洞規)」[부인동 동약]을 세워 강학(講學)과 근검으로 저축에 힘쓰게 했다. 또한 선공고(先公庫)·휼빈고(恤貧庫) 등을 두어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안정되도록 했다. 최흥원이 죽은 뒤 1789년 효행으로 정문(旌門)[국가에서 풍속을 권장하기 위해 충신·효자·열녀 등 모범이 되는 사람을 표창하고자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 세워졌고, 1790년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최흥벽(崔興璧)[1739~1812]은 조선 후기 때 학자로 자는 사교(士敎), 호는 두와(蠹窩), 본관은 경주이다. 최흥원(崔興遠)과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이광정(李光靖)과 정종로(鄭宗魯) 등과 교유하였다.
[구성]
「선사백불암선생언행총록」은 최흥원이 제수(除授)받은 벼슬에 얽힌 일화, 평소 최흥원의 아름다운 품성과 학문의 성취를 알 수 있는 일화(逸話), 최흥원과 주고 받은 대화(對話)로 이루어져있다.
[내용]
「선사백불암선생언행총록」 서두에 최흥원의 자호(字號)를 소개하고 제수받은 벼슬의 목록과 출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최흥원의 평소 품행을 알 수 있는 일화를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을묘년에 부친이 병석에 누운 지 수 개월이 되니, 선생이 정성을 다하여 약을 드리고 울면서 대변(大便)을 맛보았다. 부친[최수진(崔秀珍)]이 돌아가심에 무릇 부신(附身), 부관(附棺)을 반드시 정성스럽고 반드시 미덥게 하였다. 장례와 제사는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랐다. 한마디의 말도 집안 일에는 언급하지 않았고, 한 걸음도 여막을 벗어나지 않았다.”
“성문(星文), 지리, 복서(卜筮), 역수(歷數) 같은 학술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대체를 대략 통달하였고, 의약에 있어서는 더욱 더 유의하였다. ‘부모를 섬기는 자는 의약을 알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여, 부모가 병이 들 때마다 증세를 살펴 약제를 변별하니, 의원도 또한 지극히 신중하였다.”
[특징]
「선사백불암선생언행총록」은 언행총록이라곤 하나 형식 상 행장(行狀)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최흥원에 대해 다양한 일화가 제시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선사백불암선생언행총록」에서 나타난 최흥원의 언행을 통해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의 경주최씨 집안의 효행의 특성과 학문적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