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3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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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公山城 |
영어공식명칭 | Gongsanseong Fortress |
이칭/별칭 | 치산리성,공산석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팔공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성현 |
훼손 시기/일시 | 1597년 9월 - 공산성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파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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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596년 11월 - 공산성 개축 |
현 소재지 | 공산성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팔공산 |
원소재지 | 공산성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팔공산 |
성격 | 산성 |
양식 | 산정식 산성 |
관련 인물 | 유정|이원익 |
크기(높이,길이,둘레) | 약 3,600m[둘레]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최고봉인 비로봉과 그 북쪽에 위치한 제2봉인 산성봉을 포함한 산정식 산성.
[건립 경위]
공산성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에 나오는데, 1255년(고종 42) 공산성에 입보[성 안에 들어와 보호받음]한 백성들이 많이 굶어 죽었다는 내용이다. 공산성이 대몽 항쟁기에 입보용 산성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축조 연대는 이보다 이르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지리서에서도 공산성 기록이 나온다. 우선, 『세종실록지리지』 의흥현조에는 “공산 석성(公山石城)은 부계현 남쪽 10리에 있는데, 본현(本縣)[의흥현]과의 거리는 40리이다. 둘레가 1,353보인데, 높고 험하며, 안에 샘 둘과 작은 개천 셋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어, 신녕(新寧)·성주(星州) 임내 팔거(八莒), 대구(大丘) 임내 해안(解顔) 등 군창의 물건을 아울러 들여다 둔다.”라고 하여 당시까지 공산성이 활용, 관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도호부조와 의흥현조에는 공산성이 모두 고적조에 수록되어 있고 반쯤 무너졌다고 되어 있어 더 이상 관리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공산성이 다시 개축되어 활용된 시기는 임진왜란 때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593년 3월부터 화의 협상이 시작되는 등 전쟁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때부터 조정에서는 산성의 수축(修築)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595년(선조 28)에는 승병 유정(惟政)[사명대사]이 공산성으로 이주하여 주둔하고 성을 수축하기 시작했다. 1596년 정월에는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칠곡[현재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가까운 고을의 수령들과 산성의 수축에 대해서 의논하여 성의 수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인근 고을 사람들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렇지만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성은 1597년 9월 왜적에 의해 함락되었다. 임진왜란 때 공산성의 수축에 대한 사실은 당시 신녕현감이었던 손기양(孫起陽)의 문집 『오한집(聱漢集)』에 수록된 「공산지(公山誌)」에 잘 나타나 있다. 임진왜란 후에는 공산성이 다시 정비되지 못하고 인근의 가산산성이 새로 축조되어 방어의 거점이 되었다.
[위치]
공산성은 팔공산 최고봉인 비로봉[1,192m]과 그 북쪽에 있는 제2봉인 산성봉[1,175m] 및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방면을 골짜기를 일부 포함한 산성으로 판단된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의 경계 지점에 있다.
[형태]
공산성의 성벽에 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은 일제시대에 제작된 『조선성지실측도(朝鮮城址實測圖)』이다. 팔공산성에 대한 실측도를 보면 산성봉 정상 주위에 성벽을 표시해 놓고 있다. 이 성벽은 팔공산 정상인 비로봉으로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산성이 포괄한 범위가 어느 방향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서는 성의 대부분이 서쪽 경상북도 군위군의 구역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두 봉우리와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방면의 골짜기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공산지」의 기록을 보면 인근 고을 사람들이 성안으로 입보했을 때 주봉 동쪽 절벽과 서남쪽 골짜기에도 자리를 잡은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앞으로 정밀한 지표조사를 통해 성벽 선을 분명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성의 둘레는 『세종실록지리지』 의흥현조에 의하면 1,623.6m[1,353보], 일제 시대 조사 자료에 의하면 2,000간(間)[약 3,600m] 정도였다. 성문은 남문, 동문, 북문이 있고, 성안에 샘이 2곳 있었다. 또 임진왜란 때에는 내부에 여러 건물과 창고를 지었다고 한다.
[현황]
일제시대 조사 당시 신녕[현재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방면의 성벽은 높이 5~6척[1.5~1.8m], 길이 560간(間)[1,018m]의 붕괴된 석축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 방면은 “성벽은 대부분 천험을 이용한 것으로 둘레 약 1,400간[2,545m]의 석축이다. 석벽은 당시 대개 붕괴되고 높이 3장 여의 것도 있다. 주민들이 북문이라고 칭하는 높이 2간 여의 석문이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공산성은 그 입지로 보아 대몽 항쟁기에 입보용 산성으로 축조,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에도 일정 기간 군창을 두고 관리를 한 것으로 보이나, 세종 이후에는 폐기되어 고적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임진왜란 때 공산성이 개축되어 입보용 성으로 활용되지만, 성을 오래 지키지 못하고 왜군에 의해 함락당했다. 따라서 공산성은 외적의 침입 시 들어가 지키기 위한 입보용 산성으로 규정할 수 있다. 특히 대몽 항쟁기나 정유재란 때 중요하게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앞으로 공산성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조사와 적절한 보존, 복원 작업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