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14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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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Buddist Monk Samyeong, he was born as a hero of peopl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석배 |
[정의]
임진왜란 당시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일대에서 활동한 조선시대 승려 사명대사의 영웅담.
[개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僧軍)을 일으켜 왜적을 크게 물리치는 공을 세우고, 일본에 통신사로 건너가 지혜와 불력(佛力)으로 왜왕을 제압하고 포로 3천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임진왜란 후 민중들은 전쟁 때 입은 상처를 사명대사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통해 정신적으로나마 극복하고자 했다.
[역사 속 사명대사]
사명대사는 1544년 10월 17일에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면에서 임수성(任守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풍천인으로 속명은 임응규(任應奎)이고, 법명은 유정(惟政)이며, 법호는 송운(松雲) 또는 사명당(四溟堂)이다. 사명대사는 14세(1558)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인 15세(1559)에 아버지마저 별세하자 김천 직지사에서 신묵화상(信默和尙)의 제자로 출가하였다. 박순(朴淳), 임제(林悌), 노수신(盧守愼) 등 당대의 이름난 유생들과도 교유하였다. 사명대사는 직지사 주지를 지낸 후 1575년에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지만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1520~1604]을 찾아가 3년간 수도했다. 그 후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 전국 각처의 주요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구도에 정진하여 마침내 1586년에 출가한 지 27년 만에 충청북도 옥천산 상동암에서 득도하였다.
1592년 사명대사의 나이 48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금강산 유점사에 있던 그는 근방에 있던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왜적으로부터 구했다. 그 후 사명대사는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집하여 서산대사 휘하에서 승군부총섭(僧軍副摠攝)으로 활약하였다. 사명대사는 1593년 1월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2천 명의 승병을 이끌고 평양 전투에 참전하여 평양 탈환에 큰 공을 세우고, 1593년 3월 서울 근교의 노원평(蘆原坪) 전투에서도 매복 작전으로 왜적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려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제수되었다. 한양을 수복한 뒤 사명대사는 영남 지방으로 출전해서 전투를 하는 한편 축성과 군량미 조달에 참여했다.
사명대사는 1594년 4월, 7월, 12월과 1597년 3월 등 모두 네 차례에 적진에 들어가 왜적과 강화회담을 하였다. 그리고 1604년 8월에 일본으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1605년 5월에 포로로 잡혀갔던 3천여 명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명대사는 해인사에서 거처하다가 1610년 8월 26일 홍제암에서 설법을 마친 뒤 가부좌한 채 향년 67세, 법랍 5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임응규, 출가하여 서산대사의 제자가 된다.]
임응규는 원래 승려가 아니라 유학을 공부한 진사였다. 아내가 어린 아들을 남긴 채 일찍 죽자 임응규는 친구들의 간청으로 김씨를 재취로 맞이하여 또 아들을 얻었다. 후처 김씨가 전실 자식이 혼례를 치른 첫날 밤에 하인을 시켜 신랑의 목을 자르게 했다. 사람들은 신부에게 간부가 있어 그런 엽기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했다. 신부는 억울하여 자결하려다가 원수를 갚을 결심으로 방물장수가 되어 떠돌다가 노부부가 사는 집에 수양딸로 들어갔다. 우연히 노인의 잠꼬대를 듣고서 그가 남편의 목을 자른 자임을 알아내고, 시아버지인 응규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렸다. 응규는 아들의 머리를 다락 속 항아리에서 찾아내고, 모든 재산을 종들에게 나누어 주고 김씨 모자를 방에 가두고 불태워 죽인 후 금강산에 들어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사명대사가 서산대사와 벌인 시합에서 매번 졌다는 이야기가 여러 가지 전한다. 이것은 사명대사가 서산대사라는 뛰어난 스승을 만나 법력을 받아 도승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이다. 사명대사가 처음 서산대사를 찾아갔을 때, 서산대사는 사명대사가 올 줄 알고 상좌를 보내어 맞아오게 하여 놀라게 했다. 서산대사가 바늘이 가득한 밥을 내어 와서 사명대사는 힘겹게 먹는데 서산대사는 거침없이 먹었다. 서산대사가 살아 있는 물고기를 먹은 후 토해내자 물고기가 팔팔하게 살아 움직였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능력에 감복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어느 날 사명대사와 서산대사가 길을 가다가 붉은 소와 검은 소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어느 소가 먼저 일어날 것인지 내기를 했다. 육효점을 치니 불 화(火)점괘가 나와 사명대사는 붉은 소라고 했고 서산대사는 검은 소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검은 소가 먼저 일어났다. 사명대사가 이상하게 생각하자 서산대사는 불이 일어날 때는 검은 연기가 먼저 나는 법이라고 했다. 또 둘이 나들이를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한 촌로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마침 주인이 밀가루 반죽을 하는 것을 보고 무엇이 나올 것인지 내기를 했다. 뱀 사(蛇)점괘가 나와 사명대사는 국수가 나올 것이라고 하고 서산대사는 떡이 나올 것이라고 했는데, 떡이 나왔다. 서산대사가 사명대사에게 뱀이 낮에 나오면 국수를 먹지만 밤에 나오면 또아리를 틀기 때문에 떡을 먹는다고 일러주었다.
[사명대사, 왜적을 물리치다.]
사명대사에 관련된 설화는 여러 가지가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민중들이 임진왜란 때 입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정신적으로나마 극복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다. 왜장 평강정이 회양에서 노략질한 후 유점사에 들이닥쳐 보물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사명대사가 송백차를 내놓으며, ‘우리나라는 금과 은을 보배로 여기지 않을 뿐더러 하물며 산속의 중은 불공만 일삼고 나물을 먹고 풀을 옷 삼으며 간혹 마을에서 음식을 구해서 살고 있는데 어찌 금은 같은 보배를 가지고 있겠는가. 그리고 장군은 능히 부처의 일에 육조가 있는 줄 알 것으로 보이는데 부처의 법에 자비와 죽이지 않는 것이 으뜸이니 행랑 아래 묶어 둔 중들을 살려주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평강정은 사명대사가 범상한 중이 아닌 줄 알고 20여 명 승려를 풀어주고 물러갔다.
사명대사가 의병장으로 영남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만나보기를 청하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에 들어가 당당하게 마주앉아 담소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사명대사에게 “조선에서 제일 귀한 보배가 무엇인가?” 하자, “우리나라에서는 보배로 삼는 것이 없다. 보배를 삼는다면 오직 그대의 머리뿐이다.”라고 했다. 또 가토 기요마사가 “그것이 무슨 말인가?”라고 물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네 머리를 금 천 근과 읍 만 호로 산다. 그러니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대답하여 가토 기요마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왜적이 금정산성[지금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을 에워싸고 있을 때 사명대사가 물병의 목에 붉은 선을 그은 후 그것을 왜적들에게 보이며 “너희 도적들이 물러가지 않으면 이 물병의 목이 떨어지듯이 목숨을 보전치 못하리라.”고 호통치고, 왜적들 앞에 물병을 던졌는데 물병은 깨어지지 않고 붉은 선을 그은 목만 부러졌다. 이것을 본 왜적들은 사명대사의 신통력에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났다.
[왜왕의 항복을 받고 포로를 데리고 돌아오다.]
사명대사가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일을 혼내주고 재침을 막고자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사명대사가 동래[지금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도착했는데, 동래부사는 산승이라고 무시하며 십여 일이 되도록 와 보지 않았다. 사명대사는 왕명을 받들고 가는 자신을 멸시하는 부사를 반적이라고 꾸짖고 목을 벤 후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사명대사가 일본 땅에 들어가자 왜왕은 겉으로는 성대하게 맞이하는 척하면서도 그를 시험하거나 죽이려고 온갖 술책을 부렸다. 왜왕이 시를 적은 병풍을 30여 리에 걸쳐 세워두었는데 사명대사는 지나가면서 모조리 외웠다. 사명대사가 접빈사와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모두 외우고, 병풍이 접힌 부분은 외우지 않으니 왜인들이 크게 놀랐다. 왜왕이 십여 장이나 되는 깊은 구덩이 속에 포악한 코끼리와 독사를 넣고 유리를 덮은 후 사명대사에게 들어가 앉게 했다. 사명대사는 염주를 던져보고 유리인 것을 확인한 다음 두려운 기색 없이 태연히 앉으니 왜인들이 그 지혜에 탄복했다.
왜왕이 150자 구리방석을 만들어 놓고 사명대사에게 물에 띄우고 부유하라고 했다. 사명대사는 구리방석에 앉아 팔만대장경을 외우며 마음대로 부유하였다. 왜왕이 사명대사를 구리로 만든 집안에 앉혀 놓고 사면에 숯을 쌓고 불을 붙이고 풀무질을 하여 죽이려고 했다. 사명대사는 사면 벽에 서리 상(霜)자를 써 붙이고 방석 밑에는 얼음 빙(氷)자를 써 놓고 팔만대장경을 외우며 방이 왜 이렇게 춥냐고 호통을 쳤다. 또 왜왕이 사명대사를 죽이려고 통로에 숯불에 달군 철마를 세워 놓고 타고 들어오게 했다. 사명대사가 서쪽을 향해 묵도하니 청천백일에 갑자기 조선으로부터 구름이 일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불이 꺼지고, 일본은 온통 물바다로 변하여 수몰될 지경이었다. 왜왕이 놀라 항복을 청하자 사명대사는 해마다 인피 삼백 장과 고환 서 말씩을 조선에 진상하라고 하고, 다시 침략하는 일이 있으면 1천 부처님들이 일시에 나타나 일본 땅을 바다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했다. 그 후 일본에서 봉물을 바치기 위해 인피와 고환을 말리려 하면 큰비가 내려 썩어나가는 통에 일본인들이 거의 씨가 마를 지경이 되었다.
왜인들은 사명당을 신승·생불이라 하며 금연(金輦)을 내어 내정으로 모셔 큰 잔치를 열고, 그가 하는 말을 모두 따랐다. 사명당은 왜의 경치를 구경한다는 구실로 두루 유람하며 왜국의 모든 것을 정탐하였다. 그 후 포로로 잡혀간 백성 3천 명을 데리고 돌아오는데, 그중에서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자들은 모조리 바다 속에 빠뜨려 죽게 했다.
[사명대사, 지금도 수호신으로 살아있다.]
사명대사는 입적한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민중들의 기억과 가슴속에 이야기로 살아 있다.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는 1738년에 남붕조사(南鵬祖師)가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표충비가 있다. 표충비는 나라에 큰일이나 위기가 닥칠 때마다 땀을 흘린다. 동학혁명 때 서 말 한 되, 한일합병 때 너 말 엿 되, 삼일운동 때 닷 말 일곱 되, 8.15해방 때 서 말 여덟 되를 흘렸고, 이후에도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자주 땀을 흘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사명당이 지하에서 나라를 위해 애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명대사가 입적하기 전에 영주 부석사에 지팡이를 꽂아두면서 이 지팡이가 살아 있는 한 자기도 살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부석사에는 지금도 그 지팡이가 살아 있다고 한다. 울산에 살던 어부가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한 무인도에 떠밀려갔는데 도인을 만나 목숨을 구했다. 어부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도인이 절에서 사용하는 구리쇠로 만든 통로귀를 주면서 통도사에 갖다 주라고 했다. 통도사에 전하니 그것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맡겨 놓은 물건이라고 하고, 사명대사는 아직 살아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사명대사 이야기를 수록한 문헌]
사명대사의 일화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으로는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조경남(趙慶南)의 『경난록(經亂錄)』,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旬五志)』, 손기양(孫起陽)의 『공산지(公山誌)』, 이희겸(李喜謙)의 『청야만집(淸野謾輯)』, 심노숭(沈魯崇)의 『열조기사(列朝紀事)』,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異鄕見聞錄)』 등이 있다. 그리고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의 자신의 사적을 기록해 놓은 『분충서난록(奮忠紓亂錄)』도 있다. 『분충서난록』은 사명대사의 유고를 남붕대사가 짓고 신유한(申維翰)이 교정, 편집하여 1739년에 개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