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1428 |
---|---|
영어공식명칭 | Samil Independence Movement in Dong-gu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전개된 만세독립운동
[개설]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합한 뒤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민족동화정책을 기조로 한 식민지배정책을 폭압적으로 실행하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기 이전부터 헌병경제찰제도를 도입하여 무단통치를 시행하였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은 농민의 토지소유를 폭압적으로 소멸시키고 소작조건을 악화시킴으로써 조선인 자소작농(自小作農)을 몰락시켰다. 또 「회사령」을 실시하여 조선 내로 유입되는 일본자본을 막고, 다른 한편 조선의 민족자본이 형성되는 데 방해하였다. 이에 대한 각계각층의 일본에 대한 저항 의식은 점차 깊게 쌓여 갔다.
국제사회의 변동도 크게 발생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전후문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패전국의 식민지 민족자결을 주장하는 이른바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였다. 또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 현실적 사회주의가 등장하여 세계의 구도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양대 구도로 재편해 나갔다. 러시아는 혁명 이후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에 있어 주요 과제는 민족해방이며, 이를 위해 러시아가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국제적 정세의 변화 속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져 갔다.
3.1운동 을 촉발하는 움직임은 국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19년 2월 1일 만주 길림성에서 만주·러시아 등지에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독립운동가 39명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맞춰 독립을 선언하는 「대한독립선언서」를 채택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의 집필은 조소앙이 맡았으며, 박은식, 신채호 등이 참여하였다. 이 선언서는 외교론이 반영된 다른 독립선언서와 달리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독립선언을 천명하였다. 이어 같은 해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유학생 600여 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일제를 향한 혈전을 선포한다.”는 내용을 담은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국외 정세와 국외 독립선언서 발표로 자극을 받은 국내에서 만세시위에 박차를 가하였다. 준비과정을 거쳐 「3·1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으며,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파급 확산되었다.
[대구의 삼일운동을 주도한 대구 동구 사람들]
대구광역시에서는 네 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우선, 1919년 3월 8일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시장에서 일어난 대구 서문 밖 만세 운동이다. 대구 서문 밖 만세 운동은 대구광역시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독립의지를 만세계에 표방하였다. 이후 만세운동은 대구 인근으로 빠르고 전파되어 나갔고, 동시에 경상북도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919년 3월 30일 대구광역시 중구 남문 밖 시장에서 일어난 동화사 지방학림 만세운동이다. 세 번째는 1919년 4월 15일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일어난 대명동 만세운동이다. 마지막으로, 1919년 4월 26일과 28일 두 번에 걸쳐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서 일어난 미대동 만세운동이다. 네 번의 만세독립운동 중 동화사 지방학림 만세운동과 미대동 만세운동은 바로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일어났다.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특성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일어난 대구 서문 밖 만세 운동은 서울특별시에서 일어난 삼일운동에 참여한 세력들이 주도를 했다. 여기에 참여했던 채갑원이 자신의 고향인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으로 돌아가 자신이 속한 인천채씨 문중을 설득해 일어난 만세운동이 바로 네 번째로 일어난 미대동 만세운동이다. 두 번째, 미대동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로 동족부락민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셋째, 불교계가 대구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점이다. 서울특별시에서 일어난 삼일운동에 참여한 불교중앙학림학교 학생 윤학조(尹學祚)가 동화사로 와서 동화사 지방학림을 설득해 당시 한인이 많이 모이는 남문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킨 점이다. 특히 불교중앙학림학교 교장이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한용운이었다는 점에서, 동화사 지방학림 만세운동은 불교계가 만세운동을 지방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민족의 위기 앞에 승가대학 학생들이 삼일운동을 주도하다. 동화사 학림의 만세운동]
윤학조(尹學祚)는 불교중앙학교(佛敎中央學校)에 재학하는 동안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 뒤 만세독립운동의 전개를 위해 고향인 대구광역시 동구의 공산면(公山面)으로 내려왔다. 윤학조는 1919년 3월 23일 공산면 도학동(道鶴洞)[현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일대]에 있는 동화사(桐華寺)의 지방학림(地方學林)[현 동화사 승가대학] 학생 권청학(權淸學)과 김문옥(金文玉) 등을 만났다. 서울에서 벌어진 3.1운동의 소식을 전하면서, 민족 독립을 위해 동화사 학림 학생들이 궐기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였다.
처음에 윤학조와 동화사 학림 학생들은 공산면에 있는 백안시장(百安市場)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백안시장의 규모를 고려할 때, 만세시위의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윤학조의 의견에 따라 시위 장소를 변경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논의 끝에 동화사의 대구 포교당인 보현사에서 가까운 대구 남문 시장을 만세시위장소로 선정하였다. 그에 따라 1919년 3월 28일 김문옥과 권청학은 지방학림 학생 전원을 동화사(桐華寺) 내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심검당(尋劍堂)에 집결시켰다. 김문옥은 학생들에게 “신문 기사를 보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 내 각지에서는 벌써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들도 조선민족의 일원으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만세운동의 타당성을 역설하였다.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도 김문옥의 주장에 적극 동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다가오는 3월 30일 대구 남문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곧이어 만세시위 준비에 착수하여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었다.
1919년 3월 29일에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9명은 태극기 등 시위 물품을 가지고 대구로 출발하였다. 그날 밤은 대구 소재 동화사 포교당의 김상의(金尙儀)의 방에서 묶었다. 다음날 1919년 3월 30일 김문옥은 백포(白布)로 만든 태극기를 장대에 달아 들고 학생 일동과 함께 군중에 섞여 남문밖시장으로 들어갔다. 그때 시각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오후 2시 무렵이었다. 수천 명 인파들로 가득 찬 시장 한 가운데서 지방 학림 학생들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갑작스런 만세 함성에 놀란 군중들 역시 크게 호응하였다. 이어 학생들을 선두로 하는 군중 시위대가 시장을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급보를 받은 일본 군인과 경찰이 남문밖시장으로 달려왔다.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총검으로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전원을 검거하였다. 검거된 학생들은 이성근(李成根)·김문옥(金文玉)·이보식(李普湜)·김종만(金鍾萬)·박창호(朴昌鎬)·김윤섭(金潤燮)·허선일(許善一)·이기윤(李起胤)·권청학(權淸學)이다.남문밖시장 만세시위를 벌인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9명은 1919년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7호」위반 혐의로 각각 징역 10개월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들은 다시 공소를 제기하여 1919년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1심과 같이 「제령7호」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언도 받았다.
[마을 전체가 만세운동을 일으키다. 공산면 미대동 만세운동]
달성군 공산면(公山面) 미대동(美垈洞)[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는 인천채씨들이 오래전부터 동족부락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채학기(蔡鶴基)는 채갑원이 가지고 온 3월에 대구 서문 밖 만세시위운동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보고 민족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 뒤 채학기는 「독립선언서」와 자신이 지향하는 바의 독립에 관한 내용을 격문으로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채봉식(蔡奉植)·채희각(蔡熙覺)·채갑원(蔡甲元) 등이 만세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함께 모았다. 그들은 만세독립시위에 대한 방법을 모의한 끝에 운동 날짜를 1919년 4월 26일 늦은 시간으로 잡고, 장소는 자신들이 사는 미대동의 여봉산(礪峯山)으로 정했다. 앞의 날짜와 장소에서 독립만세를 목청껏 소리 높여 외쳤다. 독립만세의 함성은 잠자는 이곳 민중들을 일깨워 주었다. 이틀 뒤인 1919년 4월 28일 이들 네 명은 같은 집안의 채경식(蔡敬植)·채명원(蔡命元)·채송대(蔡松大)·채재갑(蔡再甲) 등과 더불어 다시 여봉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들 독립만세시위는 동족부락민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채학기를 비롯한 만세운동 참가자들은 팔공주재소(八公駐在所)의 일본경찰에게 검거되어 대구에 위치한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채학기는 헌병대에서 취조를 받으면서도 “우리 민족을 노예화하지 말라! 삼천리 강토를 약탈해 가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즉시 철폐하라”, “조선인도 자주력이 있다. 우리 민족을 노예화하지 말라”는 주장을 펼쳤다. 1919년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7호」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에서 8개월까지의 실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들의 연령은 모두 10대에서 20세에 걸친 청년층이었고, 직업은 모두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