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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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 |
영어공식명칭 | Modern Tim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876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대구광역시 동구의 역사.
[개설]
개항기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자주적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이었다.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변혁운동은 1910년 한일병합을 계기로 식민지 민족운동으로 전환되었다. 근대 시기 동구는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존립하지 않았다. 근대시기 대구광역시 동구의 지방행정구역은 많은 변동을 거친다. 즉 달성군에 속하기도 하고 현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은 수성면에 속하기도 했다. 이처럼 동구의 행정구역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동이 계속되었다.
[한일병합 이전 동구의 역사]
대구광역시 동구의 근대는 크게 1910년 8월 29일 체결된 한일병합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한일병합 이전 동구에서는 대구광역시 동구 출신 이경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계몽운동에 참여한 가운데 근대 개혁이 추진되었다. 1905년부터 1910년 사이 대구[지금 대구광역시]에는 대구광문사와 대구광학회가 설립되어 민지개발(民智開發)과 산업개발을 목표로 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907년에 국채 1천 3백만 원을 갚아 국권을 지키고자 하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다양한 민중들의 지지와 호응을 이끌어내며 전국화되었다. 1908년에는 대한협회 대구지회가 결성되어 계몽운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이러한 노력은 대체로 실력양성론에 입각해 이루어진 계몽운동이었다. 대구광역시 동구 사람들은 이경희와 같이 대구 지역의 달성친목회, 서울 지역의 교남교육회 등 계몽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를 통해 지역사회에 근대적 소양을 갖춘 청년이 양성되어 근대 변혁을 위한 노력이 계승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팔공산은 산남의진을 통한 의병전쟁의 활동 무대였다. 우재룡은 팔공산을 본거지로 하는 영천 서부지역의 의병 책임자가 되었다. 이처럼 한일병합 이전 시기 동구에서는 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이 자주적으로 발휘되고 있었다. 한편,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계기로 본적적인 한국 침탈을 가하는 과정에서 경부선철도가 부설되고, 이를 통해 대구 지역에 들어온 많은 일본인들 중 동촌[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동]에 정착하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일제강점기 무단통치와 3·1독립운동]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하면서 대한제국은 무너지고 총독부가 국가권력을 대신하였다. 일제는 ‘조선의 일본화’라는 동화주의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철저히 한국인을 차별하는 민족차별정책을 구사하였다. 일제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인들에게 폭압적인 지배 질서를 강요하였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근대법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 아래 식민지 지주제를 확립하였다. 1910년대 동촌은 대구선 철도와 대구-경주가도의 주요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해 동구 지역 주민들은 새배달모듬을 통해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팔공산 미대동 만세시위운동,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의 대구 남문밖시장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여 3.1운동이 전민족적 항일운동으로 고양되는데 기여하였다.
[일제강점기 문화통치와 의열운동, 농민운동]
3.1운동 을 통해 한국의 민족 역량에 놀란 일제는 식민지배정책을 기만적인 문화통치로 전환하였다. 문화통치의 본질은 민족분열정책에 있었다. 또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식민지지주제를 확대 강화하였다. 특히, 일본인의 동촌 침탈이 심화되어 일본인 인구에 비해 일본인이 차지하는 경제력은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지주 중심의 농업 경영은 점차 농민의 계급적 인식을 갖추어 나간 해안면 소작농들이 1925년 1월 해안소작조합을 조직하여 부당한 소작인들의 지세 납부에 맞서 지세 납부 불납 동맹 및 지세 반환 투쟁을 전개하며 저항하였다. 해안소작조합의 지세 투쟁의 대상은 대체로 한국인 지주였으며, 해안면의 경우 대구 부재지주[대구광역시 동구에 살지 않는 지주]인 반면 공산면의 경우 동촌의 지주들이었다. 지세 투쟁을 전개하면서 지주들이 소작권 박탈로 대응하자 여타 달성군내 소작조합과 연대해 낙작인회를 구성해 대항하였다. 또한 신암청년회 등 청년운동을 전개하면서, 달성군 청년연맹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간회 대구지회에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새배달모듬을 이끌었던 동구 지역의 송두환은 신간회 대구지회의 핵심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전시동원체제와 동촌]
1930년 현재 동구의 교육시설로는 1920년대 동촌에 보통학교 설립 운동의 결과 설립된 동촌심상소학교가 있다. 동촌심상소학교는 학급수 3, 교직원 수 3, 학생의 경우 남학생 60명에 여학생 58명의 규모였다. 심상소학교의 경우 일본인이 상대적으로 많이 살고 있는 곳에 설치되는 경향이었다. 공산면에는 공산공립보통학교가 개교되어 있었다. 학급 수 4, 교직원 수 4, 학생 수 286명의 규모였다.
일제는 세계 대공황 이후 일본 자본주의의 위기를 한국에 전가시키고, 일제의 전쟁정책에 한국을 강제 동원하는 방식의 전시동원체제를 운영하였다.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사상을 통제하여 일제의 전쟁정책에 순응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통해 전시체제 강화를 위해 동원하는 정책이었다.
1930년대 일제는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하였으나 이 운동의 가장 기본 목표인 자작농 창정의 성과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1920년 말 해안면에 수리조합 설립 입찰에 나서 1931년 설립을 보게 되었으나 소작 농민들의 거센 반발을 누르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해안수리조합의 관개 혜택 면적은 4,958,678㎡[500정보]였다. 일제는 전쟁동원정책을 추진하면서 각종 관변 단체를 통해 동구 주민을 강제 동원하였다. 만주침략 이후 ‘충실한 황국신민의 앙성’을 위해 공려조합을 만들었고, 매년 그 수를 증가시켜 전쟁 선전과 동원, 협력에 초점을 두었다. 중일전쟁 이후 후방의 군사후원을 목적으로 하는 7군군사후원연맹을 조직하였다. 1938년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출범시키고 아래로는 리 단위까지 조직화를 시도했다. 또 면을 단위로 국민훈련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부락연맹과 애국반을 조직하였다. 1939년 소방과 치안을 담당한다는 명목 아래 경방단을 조직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인을 일제의 지배 구조에 편입시켜 일제에 협력하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동구의 청년들을 전장으로 동원하기 위해 육군특별지원병제의 실시, 강제 노동 동원을 실시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강제징집령을 실시하고, 전방위적인 인적·물적 자원의 강제 동원정책을 실시하였다.
1930년대 일제는 대대구의 건설이라는 명목 아래 신암동, 신천동, 만촌동, 효목동 등을 대구에 편입시키고, 동변동, 서변동, 연경동 등 3동은 공산면에 편입시켰다. 1930년대 동촌유원지의 개발, 대구 동촌비행장과 부대시설인 대구항공무전국의 건설이 이루어졌다. 동촌유원지의 이용을 확대하기 위해 부영버스를 운영하고, 도로망을 재정비하거나 여름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 공사를 추진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대구 동촌비행장의 경우 해안면수리조합의 몽리 농토를 매입하는 과정이 있었고, 개장 이후 일본과 만주를 잇는 항로로 중요성을 인정받아, 군사비행장을 중심으로 운영하되 일부 민간 국제공항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1930년대 동구의 경우 대구·경북에서 전개되었던 농민, 노동, 학생, 여성 등 민족운동과 일제의 전쟁정책에 반대하는 반제운동에 개별적으로 참여했다. 일본 군국주의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즈음 1940년 대구사범학교의 항일비밀결사 무우원(無憂園)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