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1387
한자 與呂大翊
영어공식명칭 Yeoyeodaeik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내곡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682년 - 「여여대익」안명하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752년 - 「여여대익」안명하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873년연표보기 - 「여여대익」간행
배경 지역 「여여대익」 - 대구광역시 동구 내곡동 지도보기
성격 서독류|서
작가 안명하

[정의]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안명하가 대구광역시 동구 내곡동 아버지 여상제의 산소에서 극진히 시묘살이 했던 여대익에게 보낸 서간문.

[개설]

안명하(安命夏)[1682~1752]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자는 국화(國華)이고, 호는 송와(松窩)이다.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황(李滉)의 학통을 잇는 성리학과 예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상정(李象靖)·정만양(鄭萬陽)·정채양(鄭蔡陽) 등과 교유하였다. 경상남도 밀양시의 광천서원(廣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여대익의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자는 자고(子高), 호는 능천(綾泉)이다. 처음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며 효행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1705년(숙종 31) 아버지 여상제(呂尙齊)의 병을 고치려고 단지(斷指)로 간호하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상복은 입지 않되 상제(喪制)와 같은 마음으로 근신하는 일] 3년까지 전후 6년을 거상하였다.

[구성]

「여여대익(與呂大翊)」은 평소 알고 지내던 여대익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여대익이 시묘살이를 하던 여막에 조문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그간의 근황을 물어보고 있다.

[내용]

「여여대익」[여대익에게 보내는 편지] 요약 내용이다.

“작년 관차(館次)에서 잠깐 뵈었으나 돌아갈 뜻이 매우 바빠서 효자의 여막에 찾아가 조문할 수 없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서글픔이 밀려오고 가슴이 답답한 것이 마치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 같았습니다. 이후 적막히 소식을 듣지 못하여서 매번 뵐 때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달려 나가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 인편을 통해 대략 그대에게 저의 일상이 두루 편안하다는 것을 알립니다.

금년에 들어와서는 얻은바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흘러가는 대로 퇴연하게 조용히 있다 보니, 현자들이 서로 함께 절차탁마하던 교류가 간절하였으나 함께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애석해 한들 어쩌겠습니까. 그대께서는 근래 공부의 정도가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학문의 경지가 어느 정도에 올랐는지요. 조용히 산방에 있으면서 생각해보며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면서 학문에 더욱 힘쓰기를 원했습니다.

지난 겨울, 위로의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을 어찌 감히 가슴에서 잊을 수 있겠습니까. 지리가 멀고 속세의 번잡한 일로 끝내 식언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지금까지도 스스로 송구하여 땀이 한정 없이 흐릅니다. 저는 봄 초에 막내 아이의 초례(醮禮)를 치르고 혼가(婚嫁)를 다 마쳤습니다. 그저 민령(岷嶺)의 생각만 간절할 뿐이니, 조속히 찾아뵐 수 있겠지요.”

[특징]

「여여대익」은 조문하지 못한 송구스런 마음을 아주 절절히 표현하였다. 서간[편지]의 수신자[여대익]와 발신자[안명하]의 나이차가 한 살 터울 밖에 되지 않은데, 문장의 표현이 매우 공손하다.

[의의와 평가]

안명하의 『송와집』에는 여대익에게 보내는 한시 한 편, 만시 한 편, 서간문 한 편이 수록되어있는 걸로 보아 여대익과 평소 친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또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만 몰두한 안명하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서간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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