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13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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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君師傅臺巖崔公墓碣銘 |
영어공식명칭 | Epitaph of Choeg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11년 - 「대군사부대암최공묘갈명」 이상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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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81년 - 「대군사부대암최공묘갈명」 이상정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02년 - 「대군사부대암최공묘갈명」 간행 |
배경 지역 | 「대군사부대암최공묘갈명」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성격 | 비지류|묘갈문 |
작가 | 이상정 |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이상정이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의 옻골마을 입향조인 최동집을 기리기 위해 지은 묘갈명.
[개설]
이상정(李象靖)[1711~1781]은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출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다.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상정은 이황(李滉)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이재로 이어진 영남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최흥원과 교유해, 최흥원과 그 집안 관련 글을 여러 편 적었다.
최동집은 자는 진중(鎭仲)이며, 본관은 월성(月城)으로 신라 출신인 태사 평장사(太師平章事) 최항(崔沆)의 세계(世系)에서 나왔다. ‘대군사부(大君師傅)’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심양[현재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으로 인질로 가게 되었을 때 사부(師傅)로 제수되어 봉림대군을 따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구성]
「대군사부대암최공묘갈명」은 서문(序文)과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는 창작 경위와 최동집의 행력(行歷)·가계(家系) 등을 설명하고 있다. 명에는 최동집의 성정과 행실의 아름다움과 팔공산에 은거했던 삶을 노래하고 있다.
[내용]
이상정은 최동집의 5세손인 최흥원(崔興遠)의 부탁으로 대군사부 대암 최공의 묘갈명을 짓게 되었다. 「대군사부대암최공묘갈명」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동집은 품부받은 성정을 바탕으로 학문을 널리 궁구하되 특히 오경(五經)에 정밀하였으며, 문장은 웅대하면서 거리낌이 없었다. 또한 평소에 효우(孝友)에 돈독하여 부모 섬김에 정성과 예를 다하였고, 가족들을 정성스레 보살폈으며, 당대의 인재들과 벗하며 도의의 사귐을 맺었다. 1661년(현종 2) 6월 7일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76세이다. 알맞은 연월일에 고을 관아의 북촌 직지동(直枝洞) 선영 터의 간좌(艮坐)에 장사 지냈다.
[특징]
「대군사부대암최공묘갈명」 서문의 내용을 명에서 다시 한번 요약하고 있다. 최동집의 아름다운 성정과 행실이 압축되어 잘 표현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대군사부대암최공묘갈명」은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의 입향조인 최동집의 삶과 그의 사람됨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서문을 통해서 최동집의 삶을 간결한 문체로 표현함으로써 묘갈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