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당최장흥원만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1363
한자 數咎堂崔丈興遠挽詞
영어공식명칭 Sugudang Choejang Heungwon Mansa (Funeral Od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21년 - 「수구당최장흥원만사」유도원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791년 - 「수구당최장흥원만사」유도원 사망
배경 지역 「수구당최장흥원만사」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지도보기
성격 애제류|만사
작가 유도원

[정의]

조선 후기 학자 유도원이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에 살았던 최흥원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만사.

[개설]

유도원柳道源)[1721~1791]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는 숙문(叔文), 호는 노애(蘆厓)이다. 유도원은 네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더 이상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다. 대신, 존심(存心)·함양(涵養)의 실천적 수행으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최흥원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태초(太初) 또는 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다. 대대로 달성의 칠계[현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어려서부터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로 학문에 열중하였다. 백성들의 살기 어려운 상황을 보고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하여 「부인동규(夫仁洞規)」[부인동 동약]를 세워 강학(講學)과 근검으로 저축에 힘쓰게 했다. 또한 선공고(先公庫)·휼빈고(恤貧庫) 등을 두어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안정되도록 했다. 최흥원이 죽은 뒤 1789년 효행으로 정문(旌門)[국가에서 풍속을 권장하기 위해 충신·효자·열녀 등 모범이 되는 사람을 표창하고자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 세워졌고, 1790년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구성]

「수구당최장흥원만사」는 8행으로 이루어진 오언율시로, 유도원의 문집 『노애집(蘆厓集)』 2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수구당최장흥원만사」 전문 내용이다.

독행군자재(篤行君子在)[행실이 돈독한 군자가 있었으니]/고은칠계방(高隱漆溪坊)[칠계동에 높이 은거하였도다]/

지업추삼대(志業追三代)[지업(志業)은 삼대(三代)를 따랐으며]/경륜험일향(經綸驗一鄕)[경륜은 한 고을에 증험(證驗)되었도다]/

거가성교본(居家成敎本)[집안에서는 가르치는 근본을 이루었으며]/위학재륜상(爲學在倫常)[학문을 함에는 윤상(倫常)에 있었도다]/

남령금소색(南嶺今蕭索)[영남은 지금 소삭(蕭索)한데]/선생우북망(先生又北邙)[선생 또한 북망(北邙)으로 가셨도다]

[특징]

「수구당최장흥원만사」는 짝수 구(句)에 양(陽) 계열의 운자를 두고 있다.

[의의와 평가]

「수구당최장흥원만사」최흥원의 삶을 짧은 오언율시의 자구(字句)에 잘 녹여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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