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13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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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興遠墓誌銘 |
영어공식명칭 | An epitaph on the grave of Heumg-Won Choi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12년 - 「최흥원묘지명」안정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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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91년 - 「최흥원묘지명」안정복 사망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91년 - 「최흥원묘지명」저술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900년 - 「최흥원묘지명」간행 |
배경 지역 | 「최흥원묘지명」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성격 | 비지류|묘지명 |
작가 | 안정복 |
[정의]
조선 후기 실학자인 안정복이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의 백불암 최흥원을 위해 지은 묘지명.
[개설]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다. 이용후생을 중시하는 실학자로서 특히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지어 종래 잘못된 역사·지리학을 비판하였다. 천주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어서 학자들의 천주교 입문을 경고했다.
최흥원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태초(太初)·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다. 최흥원은 대대로 달성의 칠계[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살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최흥원은 1739년(영조 15)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해 「부인동규(夫仁洞規)」[부인동 동약]를 세웠다. 「부인동규(夫仁洞規)」가 설치되어도 부인동 일대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자, 1753년(영조 29)에는 선공고(先公庫)[토지세 대납]·휼빈고(卹貧庫)[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토지 지급]를 설치해 부인동규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선공고와 휼빈고가 잘 운영되어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었다. 최흥원은 경모궁 수봉관, 장악원 주부, 공조 좌랑, 익위사 익찬을 거쳐 정3품 통정대부에까지 올랐다. 죽은 뒤 최흥원은 1789년 효행으로 정려문이 세워졌고, 1790년 승정원 좌승지겸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백불암집』 8권 7책이 있다.
[구성]
「최흥원묘지명」은 서문(序文)과 비명(碑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서두에 최흥원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묘지명을 짓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자호(字號)·세계(世系)·평소의 효성스런 언행·평생에 이룬 학문적 업적·가계(家系) 등을 나열하고 있다. 비명에서는 최흥원의 공(功)과 덕(德)을 4자(字) 36구(句)로 노래하였다.
[내용]
「최흥원묘지명」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기남복(公起南服)[공은 교남(嶠南)에서 일어나시와]/자려위학(自勵爲學)[스스로 공부하여 학문을 이루었네]/
기무사승(旣無師承)[이미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바 없으며]/초연독득(超然獨得)[초연히 홀로 깨쳐 얻었네]/
말학전박(末學譾薄)[말학(末學) 천박한 사람은]/유사구이(惟事口耳)[다만 입과 귀만 일삼았도다]/
공내반본(公乃反本)[공은 이에 근본을 돌이켜서]/전무천리(專務踐履)[오로지 실천에 힘을 쏟았네]
[특징]
「최흥원묘지명」은 이광정이 지은 「최흥원행장」을 바탕으로 안정복이 묘지명을 작성한 것으로, 그 내용이 행장과 대동소이하다. 그렇지만 사건의 나열이 시대순이 아닌 주제·내용별로 이루어져 있다.
[의의와 평가]
「최흥원묘지명」서문의 내용은 「최흥원행장」의 내용을 압축해 핵심적으로 전달하였고, 문학적 요소가 많이 반영되었다. 또한 「최흥원묘지명」은 최흥원의 출생부터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룬 업적을 매우 간결한 표현으로 압축적으로 제시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