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13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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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輓呂大翊 |
영어공식명칭 | Manyeodaeik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내곡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682년 - 「만여대익」안명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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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52년 - 「만여대익」안명하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73년 - 「만여대익」간행 |
배경 지역 | 「만여대익」 - 대구광역시 동구 내곡동 |
성격 | 애제류|만사 |
작가 | 안명하 |
[정의]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안명하가 대구광역시 동구 내곡동에서 아버지 여상제 산소에서 극진히 시묘살이했던 여대익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만시.
[개설]
안명하(安命夏)[1682~1752]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자는 국화(國華)이고, 호는 송와(松窩)이다.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황(李滉)의 학통을 잇는 성리학과 예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상정(李象靖)·정만양(鄭萬陽)·정채양(鄭蔡陽) 등과 교유하였다. 경상남도 밀양시의 광천서원(廣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여대익의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자는 자고(子高), 호는 능천(綾泉)이다. 처음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며 효행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1705년(숙종 31) 아버지 여상제(呂尙齊)의 병을 고치려고 단지(斷指)로 간호하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상복은 입지 않되 상제(喪制)와 같은 마음으로 근신하는 일] 3년까지 전후 6년을 거상하였다.
[구성]
「만여대익」은 8행으로 이루어진 오언율시이다. 「만여대익」은 안명하의 문집 『송와집(松窩集)』 3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만여대익」[여대익의 죽음을 애도하다]의 전문이다.
혈읍릉천일(血泣楞泉日)[피 눈물이 날마다 못을 이루어 흘렀고]/삼상요묘성(三霜繞墓誠)[삼년의 시묘살이 지성으로 하였네]/
순심능자직(純心能子職)[진실한 마음 능히 자식의 직분이오]/지성자천생(至性自天生)[지극한 성정 하늘로부터 받았네]/
천리공유재(踐履功猶在)[실천한 공로 여전히 남아있어]/제시교가행(提撕敎可行)[이끌어준 가르침 행할 수 있네]/
사인금야몰(斯人今也沒)[이 사람 지금은 없으니]/쇠속숙부경(衰俗孰扶傾)[쇠락한 풍속 누가 붙들어 줄런가]
[특징]
「만여대익」은 짝수 구(句)에 경(庚) 계열의 운자를 두고 있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