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1345
한자 金石文
영어공식명칭 Inscriptio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일주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돌에 새긴 글자들 혹은 새긴 글의 총칭.

[개설]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 금석문에는 주로 신도비, 유허비, 사적비, 묘석, 선정비, 송덕비, 하마비, 표석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평생사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이다. 유허비는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사적비는 어떤 사건이나 사업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이다. 묘석은 전통적인 조선 시대 분묘의 봉분 바로 앞 등에 세우는 비로 묘비라고도 부른다. 선정비는 공덕을 칭송하는 문자를 새긴 비로 송덕비라 부른다.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놓은 석비이다. 표석은 어떤 장소를 잊지 않기 위한 표시(標示)로 세워놓은 돌이다. 묘정비는 서원의 내력을 기록하여 서원 앞에 세운 비이다. 순절비는 순절을 기리는 비이다.

[동구 대표적 금석문]

대구광역시 동구의 금석문 특징은 첫째, 공산전투[동수전투]에서 순절한 신숭겸 관련 비가 많다. 그 대표적 비가 고려태사장절신공 신도비, 고려태사장절신공 순절지지비, 고려태사장절신공 영각유허비이다. 둘째, 주로 송덕비가 압도적으로 많다. 셋째, 숙종, 영조 연간 이후 왕실의 원당을 한 파계사 앞에 세워진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는 주로 궁궐, 종묘, 왕릉, 관청 입구에 세워지는데, 사찰 앞에 세워진 경우는 이례적이다.

신도비로는 고려태사장절신공 충렬비[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526번지 표충사 내]가 있다. 순절비로는 고려태사장절신공 순절지지비[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526번지 표충사 내]가 있다.

사적비로는 동화사적비[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경내]가 있다.

유허비로는 숭정처사 유허비[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295번지], 고려태사장절신공 영각유허비[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 산 36번지], 동화사 인악대사비[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경내]가 있다.

각석으로는 거연천석 각석[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산 6번지]이 있다.

표석으로는 첨백당의 해방기념 표석과 석천 석각[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 979번지], 수릉봉산계 표석[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산6번지], 수릉향탄금계 표석[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39-1], 파계사 원당봉산 표석[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 산1]

묘정비는 삼충사 묘정비[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871-1번지]가 있다.

하마비는 1기로 파계사 대소인개하마비[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 7번지]가 있다.

송덕비로는 현령 심수준 청덕선정비[대구광역시 동구 안심로49길 98[서호동]], 순상국 홍재철 거사비[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경내], 순상국 오취선 영세불망비[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경내], 순상국 조병현 유공불망비[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경내], 현감 심원택 애민덕정비[대구광역시 동구 안심로 49길 98[서호동]], 판관 신처화 영세불망비[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531번지], 판관 송태진 영세불망비[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경내], 판관 신후 청덕선진비[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526번지 표충사 내] 등이 있다.

[신숭겸 충절을 기리는 비]

신숭겸의 충절을 기리는 비로는 고려태사장절신공 충렬비, 고려태사장절신공 순절지지비, 고려태사장절신공 영각유허비가 있다.

1)고려 태사 장절 신공 충렬비

고려 태사 장절 신공 충렬비는 표충재 동쪽에 있는 비각에 보존되어 있다. 1607년(선조 40) 3월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공의 외후손으로 이곳 유지를 살펴보고 크게 느끼는 바 있어 영남에 사는 후손들과 협력하여 지묘사(智妙寺) 옛터에 사우를 창건하고 충렬비를 세웠다. 비명은 예조판서 문정공 신흠이 짓고 글씨는 여주목사 김현성이 쓰고, 안변도호부사 김상용이 전자를 썼다. 정조 5년(1781년) 비각이 허물어지면서 비가 넘어져 누운 것을 관민이 힘을 다해 모아 다음 해 바로 세우고 같은 해에 비각도 개건(改建) 하였다. 고종 9년(1872년) 후손들이 힘으로 비각(碑閣)을 중수하였고 1979년에 대구시에서 보수하였다. 보통 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이의 표정은 근엄하지만, 이 비의 거북이는 귀엽게 웃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비문 해석]

고려 태사 장절 신공 충렬비(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 병서

공산(公山)의 동수(桐藪)는 고려 태사(太師) 장절(壯節) 신공(申公)이 운명하신 곳이다. 공이 돌아가신 것은 후당(後唐) 천성(天成) 2년으로 이제까지 7백여 년이 지났는데, 이곳 동수를 지나가는 사람은 아직도 경건하게 공을 그리워하기를 마지않고 그들 중에는 능히 공의 사적에 대해 가까운 과거의 일처럼 분명하게 말하는 자도 있다.

명나라 만력 정미년(1607)에 이르러 공의 외손 유영순(柳永詢)공이 이 지방의 관찰사로 부임하여 유지(遺址)를 둘러보고 안타깝게 여기며 외선조를 추념하기를 “대충(大忠) 대열(大烈)의 유지가 황폐하여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 없으니 이는 나의 책임이다.” 하고, 마침내 영남에서 사는 공의 후손들을 앞장서서 일으켜 일꾼을 모으고 재목을 모으자 그의 뜻에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공의 사우(祠宇)를 지묘사(智妙寺)터에 창건하여 관가에서 제물을 대주고 춘추로 길한 날을 가려 이 지방에 거주하는 자손으로 하여금 향화(香火)를 폐하지 말고 받들도록 하였으니, 공의 혼령이 감응하여 이곳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아울러 돌을 다듬어 공의 사적을 새길 계획으로 그 글을 흠에게 구했는데 흠도 또한 공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흠은 삼가 재배하고 말하기를 “공의 절개는 이미 강상을 붙잡아 세웠고 공의 이름은 우주에 통하여 충만하고 공의 혼기(魂氣)는 충분히 천인(天人)을 드나들어 변화가 측량할 수 없으니, 이런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마는 혹시 그 위대하고 드높은 충절이 이로 인해 비슷하게나마 나타난다면 충성을 권장하고 후세를 경계하는 공로가 어찌 적다고 할 것인가. 유공은 먼저 해야 할 일을 알았다고 하겠다. 이에 공의 행장을 살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신씨는 곡성(谷城)에서 나왔는데 고려 태조가 평산(平山)으로 본적을 하사하였다. 공의 휘는 숭겸(崇謙),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며, 그의 자는 전하지 않는다. 천성적으로 무용과 기지를 지녔는데 혁거(赫居)의 국운이 쇠퇴한 때를 만나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배반하여 동쪽과 남쪽 지방을 점거하자 공은 천명이 돌아간 데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고려 태조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며, 수륙의 정벌에 항상 공의 힘을 많이 받았다. 견훤이 신라의 도성에 들어왔을 때 여조가 정기(精騎)를 출동하여 견훤공산에서 맞아 싸웠는데 견훤의 병사가 여조를 포위하여 사태가 매우 위급하였다. 공은 대장으로서 용모가 여조와 흡사하였는데 자신이 대신 죽겠다고 청하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나가 싸우다가 사망하였고 여조는 이로 인해 위기를 벗어났다. 견훤의 병사들은 공을 여조로 알고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갔는데, 여조는 공의 시신을 찾아 장인으로 하여금 머리를 조각해 만들게 하여 의복을 갖추어 입히고 광해주(光海州) 소양강(昭陽江) 비방동(悲方洞)으로 옮겨 장사지냈으니, 그곳은 지금의 춘천부(春川府)이다.

나중에 벽상 호기위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광위이보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翊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봉하고 시호는 장절(壯節)이라 하였으며 분부를 내려 광익효절헌양(匡翊效節獻襄)의 호칭을 추가하고 묘정(廟廷)에 배향하였다. 여조가 팔관회를 베풀었을 때 신상(神像)이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춘 이적이 있었고 예종(睿宗)이 서도(西都)를 순찰할 당시 또 신상이 말을 탄 이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살아있는 사람 같았으므로 대대로 그 일을 기적으로 전해 오고 있으니, 공 같은 분은 이른바 삶을 기다리지 않고 존재하며 죽음을 따라 없어지지 않는 자가 아닌가. 예종은 시(詩)를 지어 그 일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아조에 들어와 자손이 끊임없이 고관대작을 이어받았으니, 대체로 공이 남기신 은덕인 것이다. 곡성에 있는 공의 사우는 외손 한준겸(韓浚謙)공이 그 지방 관찰사로 있을 때 그 면모를 새롭게 하였는데, 유공이 그 뒤를 이어 이번 일을 하였으니, 거룩한 일이다.

고려가 처음 일어날 당시 좌우에서 보필한 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오태사(五太師 : 배현경(裴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유검필(庾黔弼)·최응(崔凝))과 같은 이들은 사실 그 이름이 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 이룬 공이 성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사람들의 이목을 눈 부시게 하는 점에 있어서는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삼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공명은 한 시대에 그치고 말지만 충의는 무궁한 후세에 전해가는 법이니, 서로 똑같을 수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일은 우리 종친의 다행일 뿐만 아니다. 이 일로 인하여 어찌 우러러 사모하고 감동하여 떨쳐 일어날 자가 없겠으며, 또 한편 이 일을 보고 부끄러워 이마에 땀이 날 자가 없겠는가. 유공의 일을 볼 때 권장하고 경계하는 점이 다 들어있다고 하겠다. 아! 다음과 같이 명(銘)을 하노라.

임금이 천명을 받으니 공께서 보좌하시었네./동지 불러 의거하자 오백년 국운 트였네./한 나라의 기신(紀信)처럼 몸으로 인을 바꾸었네. /남은 복 뒤에 거두어 끊임없이 성대하였네.

많은 외손 가운데 훌륭한 유공 태어나시어/남쪽 지방 관찰사로 두루 돌며 교화 폈네./동수 땅에 이르러서 가슴 깊이 개탄하여/저 묵은 터 돌아보고 비 세워 사적 올렸네.

그 자취는 뛰어나며 그 이름은 우뚝하네./그 무용은 씩씩하고 그 절개는 꿋꿋하네./그 관직은 드높으며 그 깃발은 휘날렸네./소슬바람 일어나니 신이 내려 임하는 듯

번쩍번쩍 혼령의 빛 사방으로 퍼져가네./군자의 끼친 은택은 오랠수록 새롭나니/아 천만년이 지나도록 우리 백성 보살피리.

2) 고려 장절 신공 순절지지비

고려 장절 신공 순절지지비는 신숭겸 유적 내에 있다. 1819년(순조19)에 신숭겸의 28대손 신의직(申義直)이 대구부[현재 대구광역시]에 영장(營將)으로 부임했을 때 단소를 마련하고 비석을 세웠다. 1856년(철종 7) 순절비 보호각을 창건하였으며, 1872년(고종 9년)과 1928년에 중수하였고, 1986년에 정부 보조금으로 재차 보수를 하였다. 비석의 위치는 신숭겸 장군 유적에서 오른쪽으로 안내판과 홍살문이 보이며, 좌측으로는 충렬사가 보인다. 홍살문을 지나 안쪽에 보이는 작은 문을 통과하면, 장군의 순절단과 그 옆에 비각과 비석이 있다.

3) 고려태사장절신공 영각유허비

고려태사장절신공 영각유허비는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6호이다. 원래의 영각유허비는 화재로 없어졌으며, 1832년(순조 32) 후손인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신정위(申正緯)가 새로 세워 비문을 지었으며, 1848년(헌종 14) 유림에서 비석을 보존하기 위하여 비각을 세웠다. 비석 전면 중앙에는 고려 태사 장절 신공 영각 유허비(高麗太師壯節申公 影閣遺墟碑)라 새겨져 있다.

[동화사 관련 금석문]

1) 팔공산 동화사 사적비(八公山 桐華寺 寺跡碑)

팔공산 동화사 사적비는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산124번지 에 있는 동화사 사적비이다. 동화사 옛 일주문인 봉황문(鳳凰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금당선원 아래에는 인악대사를 비롯한 고승대덕(高僧大德)들과 관찰사 군수 등의 덕을 기리는 송덕비, 불망비, 기념비 등을 비롯한 수많은 금석문(金石文)이 전해오고 있다. 두 채의 비각(碑閣)과 14기의 비석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비림(碑林) 옆으로 1931년 우당거사(藕堂居士) 김정래(金鼎來)가 짓고 긍석산인(肯石山人) 김진만(金鎭萬)이 해서체 글씨로 쓴 동화사적비(桐華寺蹟碑)가 장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래의 사적비는 마멸되어 1931年 3月에 주지 황보응(黃普應)이 다시 세웠다.

동화사 사적비에는 ‘조선불교선교양종 제일수찰 대본산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동화사적비명(朝鮮佛敎禪敎兩宗 第一首刹大本山 慶商北道 達城郡 公山面 桐華寺 蹟碑銘)’ 이라 하여 동화사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사찰의 사적비는 돌을 잘 다듬어 비석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나 동화사 사적비는 자연 암반을 반듯하게 파낸 뒤에 평평하게 다듬고 글씨를 새겼을 뿐만 아니라 위쪽에 두 마리의 용을 양각으로 새겨놓았다. 여느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어 장엄하기가 그지없다.

거대한 화강암을 가운데를 네모나게 파서 다듬은 벽비(壁碑)인데, 비개를 용두로 장식하였다. 비석 덮개는 높이 50㎝, 가로 350㎝이며, 비석 몸체의 높이는 208㎝, 가로 203㎝이다.

사적비 앞에 사각기둥을 세워 비석이 오래 전해지기를 기원하는 글귀를 적었다. 기둥의 글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장비석(天藏秘石)[하늘이 신비한 돌을 감추니]/기사유황(記事有煌)[사적의 기록이 환히 빛나네.]

자안시중(慈眼視衆)[인자한 눈으로 중생을 보니]/복취무량(福聚无量)[복이 모여 헤아릴 수 없네.]

[동화사적비문 해석]

조선불교 선종·교종 제일의 사찰 대본산인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에 있는 동화사의 사적비 비명과 서문

불법(佛法)이 동으로 전해진 이래로 온 나라가 신봉하여 사찰이 명승지에 별처럼 많이 생겨나 종소리와 경쇠소리가 서로 들리게 되니, 동화사도 그 가운데 하나로서 대개 오래되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흥하고 쇠한 것이 마치 봄날의 제비가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살펴보건대, 극달화상께서 부악(父岳)의 남쪽 기슭에 절을 창건하시고 유가사로 편액하셨으니, 이때는 곧 신라 소지왕 15년 계유년[493년]이었다. 여지승람을 살펴보면, 이 산을 부악이라고 일컬었는데, 또한 나라 땅의 중앙에 가까워 중악이라고도 하였다.

나라에서 이곳에 제천단을 세운 까닭으로 나라의 중요한 산악이 되었기 때문에 공산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동사(東史)에 기록된 심지왕사의 행적을 살펴보면, 왕사가 미륵보살로부터 전래된 간자 가운데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두 개를 속리산 영심법사로부터 얻어 이곳에 소중하게 간직하여 두었다.

고려 예종 때에 이르러 대궐 안에 두고 예불을 드리다가 아홉 번째 간자 하나를 분실하였다. 왕은 이를 몹시 미안하게 여겨 송나라로부터 가져온 부처님의 치아를 대신 보내왔다. 본사에서는 미륵보살의 유훈 가운데 여덟 번째 것은 성불의 종자를 새롭게 훈육하는 것이라 하여 공산에 다시 모시게 된 것은 보기 드문 상서로운 징조로서 기념할 만하다고 생각하여 ‘공산’ 두 글자 위에 여덟 팔(八) 자를 더하여 팔공산이라고 이름 하였다.

창건한 지 340년이 지난 흥덕왕 7년 임자년(832년)에 이르러 심지왕사께서 다시 지으셨다. 동사의 심지왕사 행적을 살펴보면, 왕사는 곧 헌덕왕의 아드님이신데, 태어나면서 효도하고 공손하며, 천성이 총명하였다. 지학(志學)[15세]의 나이에 머리를 깎고 스승을 따라 도를 닦으셨으며, 중악에 머물러 구족계를 받은 뒤에 각처로 행각하였는데 마침 가야산 봉서사에 이르러 희랑조사를 참견하였다.

속리산 동쪽 관음사에 가서 영심법사를 참견하고 미륵상생경 예참간자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두 개를 얻어서 산으로 돌아오니 산악신이 두 신선을 거느리고 맞이하였다. 산초가 난 곳에 이르러 심지왕사께서 ‘장차 거룩한 간자(簡子)를 봉안할 땅을 정하고자 하니 청컨대 삼군(三君)[산악신과 두 신선]께서는 정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신들과 함께 봉우리에 올라 간자를 던지니 곧 날아가서 임천(林泉)에 떨어졌다. 마침내 그 땅에 건물을 지어 봉안하니 지금의 첨당 뒤에 있는 작은 우물이 이곳이다. 이 때 하늘이 비를 내려 함께 기뻐하였고 오동나무에는 꽃이 피었으므로 유가사를 고쳐 동화사라고 하였다.

102년이 지난 경순왕 7년 갑오년[933년]에 이르러 영조선사께서 세 번째로 다시 지으셨다. 이에 앞서 고려 태조견훤의 군대가 동수 아래에서 크게 싸웠는데, 태조가 사리탑이 내는 빛을 따라와서 선사를 만나고 화를 면하고는 감격하였다. 이때 이르러 탑묘를 장엄하게 만들고, 전우를 넓히고, 선사의 거처를 확장하였다.

일인석은 속암 뒤에 있는데, 왕이 선사를 만난 곳이니 일인은 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 고적을 경모하며 닦을 만하였다.

256년이 지난 고려 명종 20년 경술년[1190년] 불탄일에 이르러 보조국사께서 네 번째로 다시 지으셨다. 다시 7년이 지난 정사년에 국사께서는 지리산 무주암으로 옮겨 삼 년을 살다가 송광사로 옮겼다고 한다.

108년이 지난 충렬왕 24년 무술년[1298년]에 이르러 홍진국사께서 다섯 번째로 다시 지으셨다.

308년이 지난 조선 선조 39년 병오년[1606년]에 이르러 사명대사께서 여섯 번째로 다시 지으셨다. 이때는 곧 임진왜란으로 불당과 요사가 모두 불탔다. 사명대사께서는 해인사에 계셨는데, 제자 학인을 보내어 절의 천령, 해진, 옥보와 함께 준공하게 하였다.

70년이 지난 숙종 3년 정사년[1677年]에 이르러 상은대사께서 일곱 번째로 다시 지으셨다.

55년이 지난 영조 8년 임자년[1732년]에 이르러 관허, 운암, 낙빈, 청월께서 마음을 모아 여덟 번째로 다시 지으셨다. 7년 전 을사년에 모든 집채가 화재를 당하여 모두 타버렸으므로 네 승려가 함께 지은 것이다.

살피건대, 석존사리는 신라 진흥왕 10년 기사년[549년]에 양나라 무제가 사신 심호를 시켜 사리 한 상자를 보내온 것이다. 왕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법운이라고 하였다.

진평왕은 법운의 손자로서 즉위한 지 4년인 임인년[582년]에 여러 사찰에 사리를 나누어 봉안하였는데, 유독 이 절에는 1255과(顆)를 봉안하여 나라를 복되게 하는 원찰로 삼았다.

경문왕 3년 계미년[863년]에 조정에서 또 사리 일곱과를 이 절에 봉안하였다. 그 글에 말하기를, ‘대저 부처님의 가르치신 바가 이익이 대단히 많은데, 업장을 소멸하고 사물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 탑을 세워 예참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동수의 원당 앞에 연화대를 높이는 일을 하고자 해서 석탑을 세워 동자가 모래를 모은 뜻을 본받게 한다고 하였다.

헌강왕 원년 을미년[875년]에 삼강이 금당으로 탑을 옮겨 봉안하였다.

조선 중종 38년 갑진년[1543년]에 종친 해달이 중수하였다.

숙종 원년 을묘년[1675년]에 인화, 도수께서 다시 수리하셨다.

철종 4년 임자년[1853년]에 포운, 양운 두 분께서 이어 보수하셨다.

근세 신축년[1901년]에 회응선사께서 마모된 것을 바꾸고 훼손된 것을 보수하였다. 이 일을 계승하여 보응선사께서 금탑의 쇠난간을 두르시고 설운선사께서 대웅전의 돌계단을 만드셨다.

이전에 빛나고 영적(靈蹟)이 있는 귀중품으로는 불사리, 불아, 금강저, 패엽경, 구룡대, 오동향로, 고동향로, 상향향로, 부도비석이다.

아! 이 절이 생겨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1439년이 흘러 더욱 창대하여지니, 여래교가 천양됨을 생각해볼 수 있다. 현시대가 어지러워 어디로 달려가는지. 얼마 전에 현 주지 황보응은 나에게 부탁하기를, ‘우리 절에 옛날에는 사적비가 있었는데,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멸되었고, 남은 종이의 기록도 먹빛이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다. 만약 이대로 세월이 지나면 앞사람의 위대한 공적은 세상에 전해지지 않아서 뒷사람들이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의 세계라는 한탄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두려워 근래에 고찰할 수 있는 사료를 대충 모아서 여러 분들께 의견을 물어서 돌에 새기고자 한다. 그대는 번거롭다고 여기지 말아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와 황군은 일찍이 동창으로 함께 공부한 우의가 있으며, 또한 불가에도 인연이 있는 자이다. 정의(情義)로 보아 역사에 대한 안목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어서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문을 짓는다.

석가모니는 도를 깨쳐 삼계의 스승이 되었으니, 근기에 맞추어 설법을 하시고 방편으로 자비를 베푸셨네.

고해에 빠진 중생 제도하기를 기약하셔, 광명이 대천세계를 비추니, 누구들 우러러 보지 않으리오.

공산의 남쪽 자락에 가람을 열었으니, 먼저 원력의 덕을 닦고 다음에는 공덕을 크게 하셨네.

신께서 지켜주시고 선종·교종에 회통하니, 법의 보배인 사리가 세상을 끝없이 복되게 하네.

정성스런 공덕으로 귀의하여 남과 나를 이롭게 하니, 옛날보다 갑절로 흥왕했으니 어찌 후사에게도 기대하지 않으리오?

옛 자취와 지금 일을 조금도 없어지지 않도록, 서술하여 돌에 새겨, 아름다움을 드러내노라.

불기 2958년 신미 삼월 하순

우당거사 김정래 짓고, 긍석산인 김진만 쓰다.

영산전 : 광무 임인년에 수해를 입었다. 을사년에 화주 월송, 주지 황보응, 감무 최만곡, 감사 김설운, 성파, 활허, 삼사 재건, 강사 권한경, 법무 윤해붕, 서기 이영허, 서기 김용봉.

심검당 : 대정 계축 주지 김남파, 화주 황보응 중건.

금당 : 헌종 무술 화주 퇴은, 무익 재건.

비로전 : 선조 신묘 화주 서일 창건.

부도암 : 효종 무진 도오 창건. 정종 경술 춘파 중수.

내원암 : 인조 병인 유찬 창건. 순조 정해 제월 중건.

양진암 : 영종 계해 무주선사 창건. 광무 무술 운파 중수.

염불암 : 신라 경순왕 무자 영조선사 창건 후 고려 태조 증제. 광해 임자 유찬 숙종 기묘 승변 순조 계해 의암께서 모두 중수함.

포교당 : 대정 신해 창건. 대구부 아미산에 있다.

산중석덕 : 추효산, 김설파, 박추월, 이백초, 임만송, 김대암, 양화곡, 김보운, 김용학, 임재호, 정용은, 노화봉, 김월재, 김보월, 박재암, 조대우, 김긍파, 이우경, 유동은, 김대운, 심제산, 김성월, 이청운, 우서운, 이보경, 주만선, 김용하, 임선민, 김문섭.

본사 토지 면적 : 삼십육만사천육백육십오평.

산림 면적 : 육백팔정 칠반 일무 이보 육합.

소속말사 : 팔군 사십사.

본말사 토지 총면적 : 구십팔만칠천오백십사평 삼합 오작.

본말사 산림 총면적 : 삼천이백십칠정 삼반 칠무 육합 칠작.

2) 인악대사비

인악대사비는 동화사에 주석하고 계셨던 인악대사(仁嶽大師)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는 비석이다. 비석의 크기는 비석 몸이 높이 154㎝, 폭 62㎝, 두께 21㎝. 연청색 수세암(水洗岩)이며, 비석 덮개는 가로 144㎝, 세로 105㎝, 높이 68㎝. 팔작지붕형의 화강석이며, 비석 받침은 가로 170㎝, 세로 216㎝, 높이 75㎝. 봉황새 모양이다.

비석을 건립한 연대는 1808년(순조 8) 3월이며,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이는 당시 관찰사인 김희순(金羲淳)이다.

인악대사의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종지의 가르침을 세우신 화엄강주 인악대사 비명과 서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유교는 이미 쇠퇴하였고 불법이 또한 미미하니, 이단사설과 양의 탈을 쓴 승려가 패판전역하여 미혹된 업과 잘못된 습이 육진육근을 망령되게 하여 이 일단의 영광을 매몰시키니 만약 반야자주에 흔쾌히 올라서 부처의 혜명을 잇는 자가 아니라면 누가 능히 사람들을 위하여 속박을 풀어 명료한 자성을 내려 둘 것인가?

해동의 큰 선사가 계시니 인악이라, 속성은 이씨요, 법명은 의첨이시다. 고려조의 사공으로 성산부원군이신 능일의 23세 손이시다. 아버지는 휘징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이다. 1746년(영조 22) 9월 9일에 달성의 인흥마을에서 대사를 낳으셨는데, 이날 새벽 방안에는 빛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보통 아이와는 달랐다. 조금 성장함에 유가(儒家) 경전에 능통하였다. 기송에 뛰어나니 글을 읽음에 세 번을 넘지 않았으며, 그 후에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일찍이 용연산방에서 공부할 때, 불가의 청정법을 보고는 마음에서 감응이 일어나 마침내 가선헌에서 머리를 깎고 벽봉선사께 구족계를 받았다. 이어서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구하러 남쪽 여러 고을로 순력한 고사의 선례를 좇아 서악(西岳), 추파(秋波), 농암(聾巖) 등 여러 명사들께 두루 참구(參究)하였다. 이로부터 『회현기(會玄記)』를 편집하여 빗장을 열어 교종을 일으켰다.

무자(戊子)에 벽봉에게서 두 번째 계를 받고 설법단에 오른 때가 나이 겨우 스물세 살이었다. 경인년에 설파에게서 세 번째 계를 받고 드디어 선의(禪衣)를 전하니, 임제, 서산, 상봉의 원손이 되었다. 스승의 인가를 받아 후세의 모범이 되었으니, 진실로 이른바 화엄법계 가운데 분신접종하여 원력의 수레에 올라 이른 자가 아니겠는가?

이 때 영호남 여러 산에서 교화를 행하셨는데, 대저 법당을 열고 불자(拂子)를 세우는 것으로 지혜의 칼을 굳게 지켰은 즉, 팔공산은 곧 그가 돌아간 곳이다. 이에 별생이견 진보무문자들이 모두 오롯이 한 줄로 통하게 하였으니, 좋은 말이 채찍을 보자 바람처럼 내달리는 것이 많았다.

아! 대사께서는 훤칠한 칠 척의 장구로서 불법의 성이 무너지는 때를 당하여 동남지방에서 불도를 주창하여 자비심으로 널리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으니, 그가 불문에 공이 있음이 또한 많다.

경술년 수원의 용주사에서 증명사가 되었는데, 불장복문을 지어 임금의 칭상을 받았다. 이 또한 불가의 훌륭한 일이었다. 병진년 5월 보름에 병이 들어 비슬산 명적암에서 입적하시니, 세수 51세이시며 법랍 34년 이었다. 소식을 들은 자는 크게 탄식하며 큰 스승이 돌아가셨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러 제자들이 서로 더불어 서북 방향 산기슭에 다비를 하였다. 용연사의 삭발한 곳에 영당을 건립하였고 또 동화사에서 설법한 곳에 진영을 모셨다. 두 절은 달구(達邱)의 남쪽과 북쪽에 있다.

나는 유자이다. 대개 성인의 시대가 멀고, 성인의 말씀이 인멸되매, 이단이 무리지어 일어나니 불법도 또한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 첫 가르침은 마음에 나아가 본성을 보는 것이 아님이 없는데, 그 쇠퇴함은 사악한 스승과 요망한 제자가 광란을 부채질하고, 거짓을 부추겨 도를 빙자하여 무리를 미혹케 할 따름이다. 그러한 즉 대사께서 훌륭한 계율을 지켜 미혹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인도하니, 또한 가히 어두운 동굴 가운데 번갯불과 같고 사나운 물 가운데 성스러운 약물과 같다고 할 것이다.

나와 대사의 벗인 관월(冠月)이 영 밖에서 서로 만나서 스승의 행적을 자세히 들었다. 이제 또 그 문도가 스승의 비명을 간절히 구하기에, 마침내 번화함을 없애고 은근한 말로써 비문을 새기게 했으니, 훗날 사부대중들이 이 비를 읽는 자는 그 또한 깊은 뜻, 엄밀한 행실이 마음에 자극되고, 세속을 경계하게 할 것이다.

명하되

유대비구 재달지남(有大比邱 在達之南)[대 비구가 계시니 달성의 남쪽이로다.]/성광웅웅 법당심심(聲光熊熊 法幢深深)[명성은 빛나고, 위의가 깊고 깊도다.]/

작증명사 발음천고(作證明師 發音天鼓)[증명사가 되시어 천둥소리를 내셨네.]/정법안장 숙감불모(正法眼藏 孰敢不慕)[정법안장을 누가 감히 사모하지 않으리오.]/

화엄누각 자유원위(華嚴樓閣 自有源委)[화엄누각은 본디 본말이 있다네.]/이신시화 중묘재자(以身示化 衆玅在玆)[몸소 교화를 보이시니 뭇 오묘함이 여기에 있네.]/

조등재도 불일중신(祖燈再熖 佛日重新)[조사의 등불 다시 타오르고 부처님의 빛 거듭 새롭네.]/신운심월 장호금륜(身雲心月 長護金輪)[몸은 구름처럼, 마음은 달처럼 길이 금륜을 보호하네.]/

올피용찰 유엄기정(兀彼龍刹 有儼其幀)[저 우뚝한 용연사에 그 영정이 엄숙하네.]/비민말법 아륵사명(悲憫末法 我勒斯銘)[말법시대를 슬퍼하며 우리들은 이 명을 새기네.]

1808년[숭정기원후 3년 무진] 3월 일에 세우다. 김희순 짓고 아울러 전액하고 비문을 쓰다.

[동구 대표적 표석]

1) 수릉봉산계 표석(綏陵封山界 標石)

수릉봉산계 표석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3호이다. 수릉[조선 헌종의 부친인 익종의 능]의 보호를 위해 산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일종의 푯말이다. 수릉봉산계 표석팔공산 수태골에서 바윗골쪽으로 약 1km 떨어진 등산로 오른편 빈터에 자리하고 있다. 화강암 재질의 자연바위를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앞에서 볼 때 삼각형 모양이다. 명문(銘文)이 음각(陰刻)된 곳의 윗면이 튀어나와 자연적인 맛의 형태를 하고 있다.

명문의 크기는 길이 100㎝, 폭 65㎝의 범위이며 글씨체는 예서체이다. ‘수릉봉산계(綏陵封山界)’가 2열의 세로로 배치되어 있으며, 마지막 ‘계(界)’ 자는 세로로 된 두 글자의 중앙부분에 적어 놓았다. 글씨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읽는다. ‘수릉(綏陵)’은 조선 헌종(憲宗)의 부친인 익종릉(翼宗陵)이며, ‘봉산(封山)’은 산의 출입을 봉쇄(封鎖)한다는 의미이다. 대구광역시 팔공산공원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수릉향탄금계(綏陵香炭禁界)’ 표석과 같은 의미로, 글자의 크기나 규격이 비슷한 점으로 보아 동일한 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며, 이 일대가 보호림(保護林)으로 지정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수릉향탄금계’와 ‘수릉봉산계’ 표석의 건립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1835년(헌종 즉위년) 이후에 수릉의 호칭이 사용된 점과 흥선군이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2) 수릉향탄금계 표석(綏陵香炭禁界 標石)

수릉향탄금계 표석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1호이다. 수릉향탄금계 표석동화사 집단시설 지구 내 팔공산 자연공원 관리사무소 앞 화단 위에 놓여 있다. 원래는 지금의 자리에서 100m 아래쪽에 있었으나 주변 조경 및 정비 계획에 따라 이곳으로 옮겼다. ‘수릉향탄금계(綏陵香炭禁界)’의 명문에서 ‘수릉’은 조선 헌종의 부왕인 익종의 능을 말하며, ‘향탄’은 왕릉에 사용하는 숯을 의미하며, ‘금계’는 산에 출입을 금지하는 표식이다. 다시 말해서 이 표석은 수릉에 사용되는 숯을 생산하기 위해 국가에서 봉산(封山)으로 지정하여 출입을 금하게 한 표석이다.

표석의 아래에 있는 광서 6년(1880년)의 예조에서 내린 첩지 내용은 이 표석과 관계가 있다. 민헌(敏軒)이란 승려로 하여금 수릉에 공급할 조포(造泡, 두부) 제조를 대구 동화사에 맡기도록 하고, 수릉에 공급하는 향탄을 위한 봉산 수호와 팔도승풍규정도승통(八道僧風糾正都僧統)으로 임명한다는 것이다. 이 예조첩지 내용에서 현재 팔공산 일대에서 제조되는 두부가 유명한 이유와 동화사 일대의 산림이 국가보호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릉향탄금계 표석’이 세워진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수릉의 호칭은 1835년(헌종 1) 이후 수릉의 호칭이 사용된 점과 흥선군이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표석은 팔공산 수태골에도 1개가 더 전해지는데, 이것으로 보아 수태골 지역과 이곳 집단시설지구 사이의 산림은 봉산으로 지정된 보호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산림정책의 일면을 보여 주는 금석문 자료이다.

3) 파계사 원당봉산(願堂封山) 표석

파계사 원당봉산(願堂封山) 표석은 왕실의 안녕과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인 파계사의 경계를 표시한 표석이다. 원당봉산(願堂封山) 표석은 왕실의 안녕과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인 파계사의 경계를 표시한 표석이다. 이곳을 경계로 산림을 함부로 출입하며 산림을 훼손하거나 벌목하지 말라고 세운 표지석이다. 1806년에 작성된 ‘파계사 원당사적’에 따르면, 파계사는 1696년(숙종 22) 세자(영조)의 탄생을 기원하기 위해 왕실의 원당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1696년 이후 파계사가 원당으로 지정되면서 세워진 표석으로 추정된다. 원당봉산 표석은 한티재에서 파군재 방향으로 약 400m가량 지점의 오른편 길가에 있다. 팔공산 수태골에 있는 ‘수릉봉산계’와 함께 왕실을 위한 산림보호 목적으로 세워진 독특한 표석이다. 봉산제도는 조선 숙종 때 시작된 것으로 산림훼손의 방지를 위해 구역을 지정한 후 표지석을 세워 출입을 막았던 제도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산림정책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7호로 지정된 황장산봉산표석(黃腸山封山標石)과 파계사 원당봉산(願堂封山)이 그 사례다.

[동구 대표적 선정비]

1) 판관 송태진 유공불망비(判官 宋泰鎭 有功不忘碑)

판관 송태진 유공불망비는 동화사에 있는데 대구판관으로 재임하였던 송태진(宋泰鎭)이 승려들의 부역을 면하게 해준데 대한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비석 전면에는 “판관 송후 휘태진 유공불망비(判官 宋侯 諱泰鎭 有功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석의 몸체 돌의 재질은 연청색 수세암으로, 높이 114㎝, 폭 44㎝, 두께 16㎝이다. 비석 덮개는 가로 68㎝, 세로 54㎝, 높이 43㎝로 팔작지붕형이며,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비석 받침은 장방형의 화강암으로 높이 27㎝, 가로 78㎝, 세로 46㎝로 되어 있다.

2) 판관 신처화 영세불망비(判官 申處華 永世不忘碑)

판관 신처화 영세불망비는 자연석 앞면만 약간 다듬은 형태에 새긴 영세불망비이다. 비석 전면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판관 신후처화 영세불망비(判官 申侯處華 永世不忘碑)

병자 구월(丙子 九月)

3) 판관 신후 청덕선진비(判官 申侯 淸德善賑碑)

판관 신후 청덕선진비는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526번지 표충사 내에 있는 금석문이다. 비신만 있고, 덮개나 받침은 없다. 이 비석은 장절공 신숭겸장군의 충렬비각 앞에 서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71㎝, 가로 39㎝, 두께 16㎝이다. 비석은 시멘트 속에 묻혀 있다. 비석 전면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판관 신후 청덕선진비(判官 申侯 淸德善賑碑)

병자 팔월 일립(丙子 八月 日立)

4) 현감 심원택 애민덕정비(縣監 沈元澤 愛民德政碑)

현감 심원택 애민덕정비는 대구광역시 동구 안심3·4동 행정복지사무소 담장 안에 있는 금석문이다. 하양현감(河陽縣監)으로 부임하였던 심원택(沈元澤)이 백성을 사랑하고 덕정(德政)을 베풀었음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며, 갑인년(1914) 4월에 건립된 것이다. 비석의 몸체는 회백색 수세암으로 높이 118㎝, 가로 40㎝, 두께 18㎝이다. 비석 덮개는 팔작지붕형의 화강석으로 높이 46㎝, 가로 79㎝, 두께 62㎝이다. 비석 받침은 자연 형태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로 66㎝, 세로 6l㎝이며, 높이는 45㎝이다.

비석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감 심후원택 애민덕정비(縣監 沈侯元澤 愛民德政碑)

사재회외 일경청숙(四載懷畏 一境淸肅)[사년동안 두려운 마음 품으시고 다스리니, 한 고을이 맑고 엄숙한 풍숙이 되었네.]/

부호기풍 임폐사혁(蔀戶其豊 荏弊斯革)[집집마다 풍족하였고, 고을의 폐단이 이에 고쳐졌네.]/

자석불린 수공영덕(玆石不磷 壽公令德)[이 돌은 닳아 없어지지 않고, 공의 훌륭한 덕과 함께 길이 전하리라.]

5) 현령 심수준 청덕선정비(縣令 沈壽浚 淸德善政碑)

현령 심수준 청덕선정비는 하양현령(河陽縣令)으로 재임하였던 심수준(沈壽浚)의 청렴결백과 선정(善政)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비석 몸체와 비석 덮개는 커다란 자연석으로 함께 이루어져서 특색이 있다. 비신(碑身)은 높이 137㎝, 가로 89㎝, 두께 37㎝로 되어 있으며, 비석 상단 부분은 반타원형의 화강석으로 되어 있으며 가로 89㎝, 높이 69㎝이다. 비석 받침은 현재 시멘트 건조물 속에 묻혀 있다. 화강석으로 된 자연석의 전체 높이는 220㎝, 가로 l17㎝이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지동 고산초등학교 안에도 심수준의 선정비(善政碑)가 서 있다.

비석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령 심후수준 청덕선정비(縣令 沈侯壽浚 淸德善政碑)

심전자혜(心專字惠)[마음은 오로지 백성을 돌보고 은혜를 베풀며]/지일청검(志壹淸儉)[뜻은 한결같이 맑고 검소하셨네.]

일편전덕(一片鐫德)[한 조각 비석으로 공의 은덕을 새기니]/만세흠염(萬歲欽艶)[만세토록 공경하고 부러워하리라.]

정유 정월일(丁酉 正月日)

[참고문헌]
  • 대구 이야기(http://www.daegustory.com)
  • 대구광역시 동구청((http://www.dong.daegu.kr)
  •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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