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1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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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體育 |
영어공식명칭 | Physical Education |
분야 | 문화·교육/체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추제협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행하는 신체적 활동으로, 근육을 단련하고 완성된 인격을 기르는 모든 활동.
[1980년대 이전 대구광역시와 동구의 체육]
우리나라는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비로소 서양의 체육을 접하게 되었다. 때마침 설립된 한성사범학교 교사였던 헛치슨(Hutchison)의 지도에 따라 1896년에 치른 화류회(花柳會), 그리고 각 관립소학교의 운동회 등이 그것이다. 대구광역시의 경우는 1906년에 미국 기독교 북장로회 선교사 앤더슨(Anderson)에 의해 설립된 계성학교와 1907년 신명여학교의 설립으로 신교육이 시작되면서 서구의 체육이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1911년에 윤홍렬(尹洪烈)이 주도하고 간이회(簡易會)가 주관한 시민운동대회가 처음으로 실시한 근대적 운동경기회이다. 이어 1912년에는 계성학교를 중심으로 선교사에 의해 보급된 야구를 교사와 학생이 경기했고, 1914년에 대구청년단 킴과 동경유학생 야구단이 시합하여 공식적인 경기가 시작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동아일보 변봉현(邊鳳現)이 체육기관의 필요성을 제기한 이후에 여론이 형성되면서, 1919년 7월 13일에 조선체육회가 조직되고 11월 4일에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개최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각 지역에 체육단체가 조직되고 대구·경북에서도 1922년 정구인을 중심으로 대구운동협회가 조양회관에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게 바로 대구경북체육회의 전신이다. 대구경북체육회는 1922년에 대구소년축구대회, 전조선 정구대회를, 1923년에는 야구경기와 축구경기를 갖는 등 다양한 체육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26년 순종의 승하와 6·10만세 운동으로 잠시 주춤하다가 1928년에 대구 사상 최대의 종합대운동회를 달성공원, 동인동 공설운동장, 조양회관 등에서 개최하였다. 또한 1928년에 10개 팀이 참가한 야구대회가 벌어졌고 1929년 대구상업 야구부는 대구소년야구대회는 물론 일본 원정에서도 승리는 거두는 쾌거를 올렸다. 일제에 의한 탄압을 경기에서 승리로 극복하고자 했기에 더욱 여기에 집중했다. 이에 일제는 체육의 억압으로 대응했고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대구운동협회가 해체되고 창립된 영남체육회는 씨름과 육상으로 활성화시키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1938년 우리 체육회를 어용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편입시키는가 하면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조선체육진흥회를 만들어 더욱 강력한 통제에 들어갔다.
해방이 된 후 영남체육회는 다시 조직되고 8·15경축운동회와 전국중등학교 축구대회를 개최했다. 1946년에는 대구야구연맹이 결성되어 전국 도시 대항전을 가졌다. 그 외에도 마라톤대회, 탁구대회, 육상대회 등이 이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체육시설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였기에 1947년에 대구종합운동장 건립을 위한 모금을 통해 1948년에 비로소 착공하게 되었다. 1949년에 영남체육회가 경북체육회로 개칭하고 기존 전국 단위의 대회를 전국체육대회로 통합하면서 시도대항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고 경북체육회와 전국체육대회는 32회로 중단되었다. 다행히 1952년부터 전국체육대회를 이어갈 수 있었으나 그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다만, 5회 연속 서울 개최를 전국 단위로 순회하며 개최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었고 여기에 경상북도는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1960년대 들어 경북체육회는 시설 등 새로운 정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특히 제43회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기존 대구종합운동장 시설을 보완하고 이름도 대구종합경기장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실내체육관 건립을 위해 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결실을 맺기도 하며 도민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70년대에도 그대로 전해져 체육회관, 수영장의 건립과 전국 소년체육대회 유치, 1975년 제56회 전국체전의 유치 등으로 인한 시설 확충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 이후 대구광역시와 동구의 체육]
1980년대는 무엇보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의 유치로 체육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었다. 당시 직할시로 승격되었던 대구 또한 기획담당관실에 체육지원계를 설치하고 시도교육위원회에는 사회체육과를 둘 정도로 체육 진흥에 대한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경상북도와 분리되면서 대구직할시체육회를 창립하여 위축된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국체육대회에서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그럼에도 신인선수의 발굴 및 육성과 경기력 향상을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각 구별로 다양한 체육시설을 확충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이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위치한 동촌유원지 시민체육공원, 앞산심신수련장, 범어시민체육공원 등이 있다. 이어 1992년 만촌동 롤러스케이트장, 팔공정국궁장, 대구시민운동장에 스케이트장 시설 등 지속적인 시설 보강은 이어졌다.
또한 이러한 관심은 2000년대 들어 대구광역시 시민들의 건강 증진과 여가활동을 위한 생활체육[평생체육]의 중요성으로도 확대되었다. 기존 공공체육시설을 보수하거나 둔치를 활용한 체육공원의 신설이 두드러졌다. 그때 만들어진 것들 중 동구의 대표적인 예를 들면 효목체육공원, 안심시민체육공원, 불로시민체육공원, 동촌고수부지체육공원 등이다. 이러한 시설들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새로운 신도시의 출현과 함께 근린공원 조성에 체육시설을 중요하게 배치하고 있다. 2011년 제13회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는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대구광역시가 그동안 마련한 체육 기반 시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선수들이 묵고 훈련했던 공간이었던 세계육상선수촌과 율하체육공원이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어 그 관심이 더했고 지역민들에게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대구광역시 동구의 체육단체]
1992년 3월 대구광역시 동구생활체육협의회로 시작한 동구생활체육회는 체육의 저변 확대라는 맥락에서 출범하였다. 2004년 5월 4일 지금 아양아트센터인 동구문화체육회관이 개관되어 문화강좌 및 공연뿐만 아니라 수영, 헬스 등 생활체육 공간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2014년 6월 12일 강동문화체육센터를 개관하여 지역민들에게 생활체육과 문화활동이 가능한 복합체육시설을 제공하게 되었다. 동구생활체육회는 공공사업에 지원하여 재원을 마련하고 강동문화체육센터를 비롯해 율하체육공원 내 박주영축구장, 신서중앙공원 내 축구장과 풋살장, 안심체육공원 내 농구장과 하키경기장, 불로시민체육공원 내 풋살경기장과 야구장 등 동구에 있는 체육시설을 포괄적으로 이용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함으로써 지역민의 건강 증진과 활기찬 지역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