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659 |
---|---|
한자 | 崔敬學 |
영어공식명칭 | Choe Gyeongha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신기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최용석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 최경학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8일 - 최경학 대구 3·1만세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6월 4일 - 최경학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76년 - 최경학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최경학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최경학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최경학 츨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신기동 |
활동지 | 최경학 활동지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로 35[대신동 277-1] |
묘소 | 최경학 묘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자 |
대표 경력 | 계성중학교 교사 |
[정의]
근대시기 대구광역시 동구 신기동 출신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최경학(崔敬學)[1890~1976]은 경상북도 경산군 안심면 신기동[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신기동] 출신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현 대구광역시] 서문[현 서문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교사였던 최경학은 3·1만세항쟁 소식을 듣고 이만집·김태련·김영서·이상백·백남채·정재순(鄭在淳)·정광순(鄭光淳)·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 등과 함께 만나, 서문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최경학은 계성중학교 학생 동원을 담당하였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학생들도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계통의 성경학교(聖經學校)와도 연락을 취하여 연합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다. 「대한독립기」라고 쓴 큰 깃발과 크고 작은 태극기 40여 매를 만드는 등 사전 준비가 진행되었다. 이에 앞서 1919년 3월 3일 홍주일(洪宙一)이, 1919년 3월 7일에는 백남채가 일제의 예비 검속때에 체포되어 주동인물들을 긴장시켰으나 거사 계획은 강행되었다. 1919년 3월 8일 아침 일찍부터 도청 정문 등 요소에 태극기와 격문이 살포되었으며, 그는 오후 3시에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1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일본 경찰과 기마대의 제지를 물리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경찰서 앞의 제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청(達城郡廳) 앞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6대의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대기중이던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게 되어, 부득이 행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일본군·헌병·경찰은 시위대열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시위군중을 구타하며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최경학은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1919년 6월 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의 징역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묘소]
최경학의 묘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내 제2-799에 있다.
[상훈과 추모]
최경학은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