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621 |
---|---|
한자 | 英祖 |
영어공식명칭 | Yeong Jo |
이칭/별칭 | 이금(李昑),광숙(光叔),양성헌(養性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정의]
조선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에 있는 파계사(把溪寺)에 탄생이야기를 갖고 있는 왕.
[가계]
영조의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금(李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부친은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肅宗)이며, 모친은 화경 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 왕후(貞聖王后)이고,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 왕후(貞純王后)이다. 자식은 2남 7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효장세자(孝章世子), 사도세자(思悼世子)이며, 딸은 화순옹주,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화유옹주, 화녕옹주, 화길옹주이다.
[활동 사항]
영조는 1694년(숙종 20) 9월 13일에 창덕궁(昌德宮) 보경당(寶慶堂)에서 태어났다. 1699년(숙종 25)에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고, 1721년(경종 1)에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으며, 1724년(경종 4)에 즉위하여 1776년(영조 52)에 승하하였다. 왕으로 재위한 기간이 52년이고 수명은 83세였다.
1693년(숙종 19) 10월 5일 숙종은 밤에 고박산승(古朴山僧)이 대전으로 들어와 3일간 상스러운 빛을 밝히는 꿈을 꾼 뒤에 사람을 시켜 그 빛을 찾았는데,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 팔공산 파계사에 주석하던 승려 영원이었다. 숙종은 몹시 기뻐하며 영원에게 왕자의 잉태를 부탁하였다. 이에 영원은 수락산(水落山) 성전암(聖殿庵)에서 100일 기도를 올렸는데, 1694년 왕자가 태어났으니 바로 영조였다. 숙종은 이에 보답하는 뜻으로 영원에게 현응(玄應)이라는 법호를 내리고 내탕금(內帑金)을 주어 파계사를 대대적으로 중수하게 하였다.
한편, 영조가 11세에 썼다는 ‘현응전(玄應殿)’이라는 현판이 지금까지 성전암(聖殿庵) 법당에 걸려 있는 점이나 1979년 파계사 원통전(圓通殿)의 관세음보살상을 금칠하다가 발견된 영조대왕의 도포[국가민속문화재 제220호] 등이 영조와 파계사의 긴밀한 인연을 말해준다. 도포와 함께 발견된 한자 두루마리에 적힌 발원문에 의하면, 영조 16년(1740) 9월 파계사 대법당을 수리하고 영조가 탱화 일천불을 희사하면서 이곳을 왕실을 위해 기도하는 도량으로 삼고 영조의 청사상의(靑紗上衣)를 복장하여 만세유전을 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파계사(把溪寺) 앞마당에 ‘영조(英祖) 나무’라 불리는 25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는 영조가 심은 것은 아니지만, 영조와 당시 파계사 주지였던 승려 영원(靈源)의 인연을 생각해서 후대에 이름 붙여졌다. 파계사의 부도탑 옆에 세워져 있는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는 숙종임금이 하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영조의 출생과 관련된 파계사의 위상을 얼마나 높이 인식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묘소]
영조와 계비 정순 왕후의 무덤인 원릉(元陵)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영조의 신위는 종묘에 봉안되었고,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