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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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水黃氏 |
영어공식명칭 | Jangsu Hwang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입향 시기/일시 | 1600년 초반 - 장수황씨 황경림이 경산 하양에서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으로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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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장수 - 전라북도 장수군 |
입향지 | 장수황씨 입향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
세거|집성지 | 장수황씨 집성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
묘소|세장지 | 장수황씨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초례산 |
성씨 시조 | 황경 |
입향 시조 | 면와 황경림 |
[정의]
시중을 지낸 황경을 시조로 하고, 면와 황경림을 입향조로 하는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에 세거한 성씨.
[연원]
장수황씨는 통일신라 경순왕의 부마로 시중(侍中)을 지낸 황경(黃瓊)을 시조로 한다. 황경의 9세손 황공유(黃公有)가 고려 명종(明宗) 때 전중감(殿中監)으로 무신난을 피해 장수로 낙향하였고, 15세손 황감평(黃鑑平)이 후학을 위한 덕망 있는 학자였다는 것 외에는 이조 참의를 역임한 18세손 황석부(黃石富)까지 고증할 자료가 없다. 그래서 후손들이 황석부를 1세조로 하고 장수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황석부는 황희(黃喜) 정승의 증조부로 사후에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장수황씨는 황희의 아들 대에서 호안공파(胡安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열성공파(烈成公派)로 분파되어 번성하였다.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의 장수황씨는 열성공파 후손들이다.
[입향 경위]
장수황씨 1세조 황석부(黃石富)의 증손이 바로 세종 때의 명재상인 방촌(厖村) 황희(黃喜)이다. 그의 아들 황수신(黃守身)을 거쳐 손자 황성(黃省) 대에 이르러 경상도에 정착한 듯하다. 이후 그의 후손인 황혁정(黃赫禎)이 상주에서 경산 하양으로 이사하여 정착하였고, 아들 황헌(黃憲), 손자 황인(黃認)을 거쳐 증손자 면와(勉窩) 황경림(黃慶霖)[1561~1625] 대에 이르러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에 정착하면서 대구광역시 동구 입향조가 되었다. 황경림은 임진왜란 때 신해(申海)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하양 의병을 이끌고 영천 전투에 참전하여 성을 회복하였고, 신해가 진지를 옮긴 뒤에 하양의병장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창녕 화왕산성에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화왕산성을 고수하였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뒤에 가족을 이끌고 원래 거주지인 하양읍 방면에서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초례산(醮禮山) 안방곡(安芳谷)에 은거하여 경전을 읽으며 성리학을 탐구하며 다시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말을 하지 않았다. 좋은 날씨에는 몇몇의 수재를 데리고 팔공산과 금호강 사이를 유유자적하였다.
[현황]
면와 황경림이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에 입향한 이후 4명의 손자 중 둘째인 황희룡(黃羲龍)은 동내2동에 정착했고, 셋째인 황우룡(黃禹龍)은 이웃한 현재의 신기동 신촌에 정착했으며, 막내인 황원룡(黃元龍)은 동내1동에 정착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은 장수황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2007년 현지 조사에 의하면 동내1동과 2동에는 모두 122가구가 거주하는데, 이중 장수황씨가 57가구에 달하여 절반 정도이고, 이들 대부분은 면와공파 후손들이다. 그러나 대구혁신도시조성사업이 2007년부터 시행되면서 동내동의 장수황씨 면와공파의 종족원들을 포함한 지역민들은 마을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장수황씨 면와공 종중은 수백 년 동안 조성해온 선영을 승방재 부근으로 이장하였다.
[관련 유적]
장수황씨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초례산 승방골 기슭에 있는 승방묘원,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에 있는 승방재(勝芳齋),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에 있는 동호서당(東湖書堂),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 있는 임진창의제공하양사적비,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에 있는 황경림나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