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4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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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興遠旌閭閣 |
영어공식명칭 | Monument Pavilion of Choe Heung-wo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37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호 |
건립 시기/일시 | 1789년 - 최흥원정려각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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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06년 4월 20일 - 최흥원정려각,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최흥원정려각,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재지정 |
현 소재지 | 최흥원정려각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375 |
성격 | 정려각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최두영 |
문화재 지정 번호 |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있는 최흥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789년 건립된 정려각.
[개설]
최흥원정려각은 1789년(정조 13년) 최흥원 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최흥원정려각 홍패에는 ‘효자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 행어모장군 세자익위사익찬 최흥원지려’라고 적혀 있다. 최흥원[1705~1786]의 호는 백불암이다. 1778년(정조 2)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릉 참봉이 되었고, 1782년 장악원 주부, 1783년 공조 좌랑을 거쳐, 1784년 세자 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贊)이 되었다. 최흥원은 평생을 거의 대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최흥원의 학덕을 높이 세워 사람들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 중 한 사람으로 추앙하였다. 최흥원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에 은거하면서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 「부인동동약」을 1738년(영조14)에 실시하였다. 최흥원은 부인동 마을[오늘날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신무동] 사람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보고 ‘공을 앞세우고 빈민을 구제한다’는 선공고(先公庫)·휼빈고(恤貧庫)를 두어 농민의 고통문제와 생활안정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부인동동약」은 큰 성과를 거두어 정조 임금에게 칭찬받기까지 하였다. 정조의 명령으로 최흥원정려각을 세우면서, 옻골마을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으며 그때 모인 사람들이 지은 시가 수십 편이 넘는다고 전한다.
[위치]
최흥원정려각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면 도로의 우측에 있는 동계(東溪)를 끼고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형태]
최흥원정려각은 단칸 규모이다. 최흥원정려각은 얕은 기단 위에 자연석 화강암 초석을 놓고 원주[원기둥]를 세워 벽면을 구성하였다. 벽면의 상부에는 모두 홍살[국가에서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고자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던 붉은 문 위쪽에 촘촘히 박힌 세로 살대]을 설치하였다. 기둥 위에는 이익공[살미 부재가 새 날개처럼 생긴 공포 형식을 익공이라 하는데 익공이 2개로 이루어진 양식]으로 장식하였다. 상부 구조는 삼량가로 결구하여 겹처마[처마 끝의 서까래 위에 짧은 서까래를 잇대어 달아낸 처마]를 올리고 맞배지붕[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지붕의 두 면이 서로 등을 대고 있는 형상]을 이었으며, 지붕의 양 측면에는 풍판[맞배지붕의 양 측면 부분에 비바람을 막기 위해 판재를 이어 붙여 만든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단청은 내·외부 모두 건축 부재(部材)의 끝머리 부분에만 문양을 넣는 모루단청[목부재의 끝부분에만 머리초문양을 장식]을 하였다.
[현황]
최흥원정려각 주위에는 한식 토석담장으로 방형의 공간을 구획하고 정면에는 일각문을 세웠으며 중앙에 비각이 자리잡고 있다.
[의의와 평가]
영남삼로 중 한 사람인 백불암 최흥원 선생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각이다. 최흥원정려각은 2006년 4월 20일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