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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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符仁寺址|夫人寺址 |
영어공식명칭 | Buinsa Temple Sit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로 967-28[신무동 356-1]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배성혁 |
건립 시기/일시 | 통일신라 - 부인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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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88년 5월 30일 - 대구 부인사지,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9년 - 부인사지 1차 대구대학교 발굴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1년 - 부인사지 2차 대구대학교 발굴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3년 - 부인사지 3차 경북대학교 발굴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 - 부인사지 4차 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 발굴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0년 - 부인사지 5차 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 발굴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1년 - 부인사지 6차 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 발굴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대구 부인사지,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 |
소재지 | 부인사지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로 967-28[신무동 356] |
성격 | 사찰터 |
지정 면적 | 60,600㎡ |
소유자 | 부인사 |
관리자 | 부인사 |
문화재 지정 번호 | 대구광역시 기념물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팔공산 중턱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절터.
[개설]
부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 부인사(符印寺) 또는 부인사(夫人寺)라고도 일컬어진다. 부인사는 고려시대에 대장경판의 봉안처로 유명하며, 문헌기록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 권21, 세가(世家) 권53, 행지(行志),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명병서(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銘幷序)」, 이규보의 「대장경판군신기고문(大藏經板君臣祈告文)」 등을 살펴보면, 부인사에 큰 홍수가 있었다는 사실, 부인사 승려들이 무신집권에 항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사실, 부인사에 초조대장경판과 속장경판을 봉안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부인사는 불교가 흥왕하던 신라와 고려 때에는 약 2,000명의 승려가 수도하는 대사찰이었다. 초조대장경판은 몽골의 2차 침입 때 대부분 불타 없어졌지만, 일본 교토(京都)의 남선사(南禪寺)의 522종(種), 1,823권(卷), 1,712책(冊)을 포함 국내외에 약 2,000여 권이 전해지고 있다.
[변천]
부인사 창건시기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 알기 어렵지만, 대체로 선덕여왕의 재위기[632~637]와 성덕왕 재위기[702~737]라는 견해가 있다. 연기설화에 근거해 선덕여왕대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문헌 기록에 부인사가 일명 대가람(大伽藍)이라 불리며 북쪽 공산에 있고 신라 성덕왕이 창건했다는 기록과 6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한 고고학적 성과, 부인사가 창건되면서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8~9세기 양식 삼층석탑, 금당지[절의 가장 중심이 되는 법당인 금당이 있던 자리]를 근거로 8세기 초에 창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부인사는 고려시대 초조대장경판과 속장경판이 봉안될 정도로 번성하였나 1232년(고종 19)에 몽골의 제2차 침입으로 소실되면서 위세가 약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인사는 다시 불에 탔으나 1617년(광해군 9) 중창하였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부인사 사찰은 대부분 불에 탔고, 1959년 대웅전, 응진전, 칠성각 등을 중창함을 시작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위치]
부인사지는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356번지 일대 팔공산의 중턱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부인사지에 대한 학술조사는 1960년대 신라오악조사단이 부인사지의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는 석탑, 초석, 탑재, 석등대석 등을 발굴하면서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후 부인사지 발굴조사는 6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1차 발굴조사는 1989년 7월 3일~8월 9일까지 대구대학교박물관이 실시해 경판고지로 추정되는 건물지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확인된 유구[집자리, 무덤 등 옛사람이 남긴 삶의 흔적]가 초조대장경판 소실연대보다 후대 시기로 추정되었고, 하층의 유구는 확인하지 못했다.
제2차 발굴조사는 1991년 1월 3일~6월 8일까지 대구대학교박물관이 진행했고, 대웅전의 서편 일대에서 담장지, 중문지, 주초석[건축물의 기둥을 받쳐주는 돌]과 구 계단지 일부를 확인하였다.
제3차 발굴조사는 1993년 2월 1일~4월 10일까지 경북대학교박물관이 실시했고, 상단의 대형 축대위에 마련된 통일신라시대 창건기로 추정되는 금당지, 그 북쪽에 위치하는 고려시대 대웅전지를 확인하였다.
제4차 발굴조사는 2004년 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가 실시했고, 주로 금당지의 기단 북쪽에 접한 동탑지에 대한 시굴조사였다. 동탑은 해체하여 하부구조를 파악하고, 서탑외곽까지 조사하여 탑지의 구조와 창건기 금당지의 중복관계를 파악하였다. 조사결과, 동탑과 서탑은 8~9세기 무렵에 부인사 창건 당시 금당과 함께 조성되었으나 고려 초에 이건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제5차 조사는 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가 추정 경판고지에 대한 재조사로 2010년 6월 15일~9월 5일까지 진행했고,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중복관계를 이루는 건물지 5동, 담장지,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제6차 발굴조사는 2011년 10월 13~12월 30일까지 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가 제5차 조사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었는데,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건물지 6동, 각종 석렬[열을 맞춰 늘어서 있는 돌], 숯가마 등이 확인되었다.
여섯차례에 걸친 밝혀낸 고고학적 성과만을 근거로 하면, 부인사의 창건시점은 대체로 8세기 초로 볼 수 있다.
[현황]
현재 부인사에 남은 건물은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세운 건물로, 부인사가 창건할 당시로 추정되는 문화재로는 석조물 일부와 건물지밖에 없다.
부인사지에는 상단의 대형 축대 위에 통일신라시대 창건기로 추정되는 금당지가 남아있다. 창건 당시 축조한 대형 축대에 사용된 석재는 100㎝×150㎝ 내외의 방형, 장방형 석재들로 상하 엇물리게 바른층쌓기로 축조하였으며, 규모는 동서 길이는 55m, 높이는 3~4m 정도이다. 축대의 중앙에는 남쪽으로 낮은 대지에 연결된 계단이 마련되었고, 남쪽으로 10m 위치에는 중문지가 위치하였는데, 중문지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현재 주초석이 남아 있다. 창건기 금당지의 북쪽에는 고려시대 대웅전지가 남아 있고, 그 남쪽으로 석등 1기와 배례석[불을 켜거나 향을 피우고 또는 음식을 차려 놓는 판돌로 그 앞에서 절을 하는 장소로 사용] 1기가 있으며, 대웅전 터의 서쪽에는 쌍화사석등(雙火舍石燈) 1기가 서 있다. 대웅전 터의 남쪽 좌우로는 통일신라시대 양식 3층 석탑이 동서에 배치되었다. 한편, 중문지에서 정남쪽으로 난 진입로 좌측에는 은통당(隱通堂) 팔각원당형 부도 1기, 석종형 부도 1기가 배치되었고, 남쪽으로 경판고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있다. 경판고 건물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축조된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증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부인사지는 6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성과에서 출토된 유구와 유물을 통하여 부인사의 창건 시점 및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부인사지는 1988년 5월 30일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 보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