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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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四一九革命 |
영어공식명칭 | 4·19 Revolution |
이칭/별칭 | 4·19혁명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60년 4월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 이승만정권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에서 통일운동으로 확대된 변혁운동.
[개설]
대구광역시 동구의 4.19혁명은 직접적으로 운동과 혁명을 촉발시켰다기 보다 허정과도내각과 장면정권 수립 이후에 사회개혁을 지향하는 민주운동과 민족모순을 해결하려는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역사적 배경]
4.19혁명 은 이승만정권의 영구 집권을 꾀하면서 부정선거를 저지른 것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한 반독재투쟁이었다. 대구직할시[지금 대구광역시]에서는 1960년 2·28학생운동이 발생하여 학생층의 이승만정권에 대한 경고와 저항이 시작되었다. 이후 1919년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1960년 4월 25일 대학교수의 시국선언문 발표와 가두시위를 계기로 미국이 이승만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허정 과도내각의 협조 아래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
[경과]
대구광역시 동구 사람들의 4.19혁명 시기 활동은 평화 통일운동과 이대 악법 반대 투쟁에 집중되었다. 평화 통일운동은 민족자주통일경북도연맹을 통해 이루어졌다. 민족자주통일경북도연맹은 1960년 9월 민주구국동지회를 해소하고 결성한 경북시국대책위원회를 확대 변경하여 조직한 단체였고, 중앙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에 참가하였으며, 청년조직으로 경북민주민족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장면 정권이 「반공특별법」과 「데모 제한법」 등 ‘이대 법안’을 제정하자 1961년 3월 각종 정당·사회단체 및 학생 단체 대표들이 모여 ‘이대 악법 반대 경북 정당 사회단체 노동단체 학생단체 공동투쟁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특히, 1961년 4월 2일 현 대구광역시 동구 대구역광장에서 진행하기로 계획한 이대 악법 반대 대구 궐기 대회 및 횃불 데모는 가장 대표적인 시위로 평가받는다.
[결과]
4.19혁명 은 민주운동에서 출발하여 통일운동으로 확산되어, 한국현대사에 있어 민주·민족운동의 첫 출발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졌지만, 1961년 5·16군사정변의 발발로 민주·민족운동은 완결되지 못한 채 좌절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4.19혁명을 미완성의 혁명이라 한다. 5·16군사정변 이후 민주·민족운동은 ‘군사혁명재판’을 통해 탄압을 받았다. 군사혁명재판에서 탄압받은 동구 사람들은 서상일, 성낙과, 권달섭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대구광역시 동구 사람들이 참여한 4.19혁명은 이승만정권의 영구 집권을 꾀하면서 부정선거를 저지른 것에 저항하여 발생한 민주운동이자 분단으로 인한 민족모순을 척결하기 위한 통일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