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1422
이칭/별칭 봉무레포츠공원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50길 66[봉무동 496-3]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주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봉황이 춤추는 봉무공원 봉무공원 개장
봉무공원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50길 66[봉무동 496-3]지도보기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위치한 공원

[봉황과 팔공산자락]

우리 민요 중에 대표 격으로 새타령이 있다. 노랫말 중에 “새 중에는 봉황새”라는 구절이 있는데 봉황을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새를 노래했을까. 모든 새의 왕이라 불리는 봉황은 동양에서 주로 민간 전설과 신화에 등장해왔다. 고문헌에 따르면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원앙의 뺨,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용의 무늬까지 겸비한 봉황은 키가 약 6척이고 오색 깃으로 찬란하게 빛난다고 묘사되어 있다. 고귀하고 인자한 이들을 알아보고 이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존재로 알려져 있기에 예로부터 황제의 자리에 문양(文樣)으로 새겨졌으며 지금도 우리나라 대통령의 휘장(徽章)에 등장할 정도이다. 봉황은 상상의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했던 것이다.

대구광역시에서 봉황을 가장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팔공산 자락이다. 우선 봉황의 전설을 지닌 동화사는 그 터가 풍수지리상으로 봉황이 알을 품은 모습이기에 드나드는 문의 이름조차 봉황문(鳳凰門)이라 부른다. 봉서루(鳳棲樓)라는 누각도 봉황이 깃든 누각을 뜻하며 절에는 3개의 봉황 알을 상징하는 돌도 놓여져 있다. 또한 동화사 대웅전 천장에는 세 마리의 용과 여섯 마리의 봉황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봉황은 태평성대에 나타나며 오동나무에 깃든다는 전설이 있으니 한겨울에 오동나무꽃이 핀 것에서 이름을 정한 동화사는 그 관계가 밀접하다고 할 수 있다.

[봉무정과 봉무동]

팔공산자락에는 동네 이름조차 봉황이 춤추는 곳, 봉무동(鳳舞洞)이 있다. 봉무동에서 전하는 봉황과 오동나무에 관한 이야기는 보다 구체적이다. 예로부터 오동나무가 많았던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동수’라 불렸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잣더니,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밤중에 일편명월(一片明月)만 빈가지에 걸렸어라”고 하는 옛시조 대목처럼 오동나무와 봉황은 밀접한 관계이기에 자연히 봉황의 전설이 나올 법한 장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후기 어느 날, 정자 곁에 저수지를 마련하기 위해 구덩이를 팠더니 땅속에서 봉황이 나와서 북쪽으로 날아가더라는 것이다. 그에 걸맞게 봉무동의 뒷산 모양은 춤추는 봉황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 정자는 봉무정(鳳舞亭)이라 불리며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종 12년이던 1875년,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봉촌(鳳村) 최상룡(崔象龍)이 지은 이곳 봉무정은 북쪽으로는 팔공산을 두르고, 서쪽으로 금호강이 흐르며 앞에는 봉무의 넓은 들판이 펼쳐진 명소이다. 최상룡봉무정 주위에 오동나무와 대나무도 심어 인과 의를 실현하는 공간으로 구상했다고 한다. 평소 지역 유림들로부터 존경받던 최상룡봉무정봉무동의 행정사무소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곳은 현재 대구광역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전통 공공건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최상룡의 호가 봉촌이어서 ‘봉황이 사는 마을’을 의미하니 그가 이 마을에 가진 자부심과 신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살던 시기가 1800년대 초반이므로 삼정(三政)이 문란하던 시기에 봉황이 춤추는 평화로운 마을이 되기를 희망했던 마음도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최상룡봉무동에 있는 독암서당에서 배움의 장을 열기도 했으며, 봉무정을 중심으로 봉무동 규약인 향약을 만들어 봉무동의 주민 계몽에 힘썼다.

[봉황이 춤추는 동아시아 신도시]

최상룡의 시절이 가고, 근현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봉무동은 유독 낙후된 지역으로 존재해왔다. 1990년대 들어 인근에 있는 지묘동에 아파트단지가 세워지고 고가도로 건너 불로동에 각종 생활편의시설이 들어서던 때에도 그 가운데 놓인 봉무동에는 여전히 논밭과 염소농장 등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유독 개발이 비껴가던 봉무동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이 일대에 이시아폴리스라는 주거상업지구가 들어서면서 자족 가능 도시로 발돋움했기 때문이다. 대구시와 포스코건설의 대규모 프로젝트로 계획된 이시아폴리스는 성공적인 지역개발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이스트 아시아 폴리스, 즉 동아시아의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의미로 설계된 이시아폴리스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일대 117만6천여 제곱미터의 규모의 복합신도시로 개발되었다. 2008년 1월 부지조성공사가 시작되면서 대구의 랜드마크로 자리를 잡은 이곳은 산업단지·상업단지·주거단지를 모두 갖춘 새로운 타운의 형태여서 더욱 주목받았다. 실제로 학교 4곳·기업 30여 곳이 들어서면서 산업·상업·교육·주거·문화·레저·휴양시설까지 갖춘 자족형 복합신도시로서 이른바 동아시아 중심도시로서의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2011년 당시만 해도 1900여 명에 불과하던 봉무동 인구는 오늘날 5만명의 유동인구가 생활하는 복합도시로 재탄생하였다.

현재 봉무동 중심지에는 대형쇼핑몰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영화관 및 등산복 아울렛이 즐비한 상황이다. 이로 인해 지금의 봉무정은 신도시의 풍경과 공존하고 있어 시대를 넘나드는 묘한 느낌을 준다. 특히 이시아폴리스가 지원하고 동구청이 주관해 봉무정 일대를 말끔히 정비해 놓은 상태이기에 그 대비는 더욱 극명하다. 이와 더불어 대구광역시 동구는 1992년 10월 문을 열었던 봉무공원을 다시 특색 있게 꾸며 선보임으로써 지역민들의 발길을 끄는 사업을 하였다.

[봉무공원과 붉은 흙의 연못, 단산지]

봉무공원은 도심 속 자연공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공원 면적은 151,888㎞[4만 5,946평] 규모로 각종 레저 코스를 갖추고 있다. 봉무공원 등산안내도에는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 식보보다 행보(行補)”라 하여 좋은 약보다 좋은 음식이, 좋은 음식보다 걷는 것이 더 좋다는 『동의보감』의 구절을 빌어 건강과 풍경을 함께 취하라고 권한다. 지역민들이 선호하는 봉무공원 내 산책코스는 세 개로 나뉘는데 45분가량 걸을 수 있는 3.7㎞의 짧은 등산로가 첫 번째이다. 이 구간에는 부드러운 모래를 깔아놓아 안전하고 편하게 걸을 수 있다. 또한 2시간 30분가량 걸어야 하는 7㎞의 만보산책로가 두 번째이다. 이 코스의 경우 산길을 올라 정상인 감태봉과 구절송 전망대를 둘러본 뒤 나비생태원으로 돌아오도록 조성되어 있다. 한 그루터기의 나무가 아홉 갈래로 자라는 보호수인 구절송 곁에 서면 대구 시가지 및 금호강 경관을 따라 동촌방촌 일대를 관망할 수 있어 누구나 쉬어가는 지점이 된다. 만보산책길은 계단이 목재로 되어 있어 걷기에 편리하며 체육시설과 야영시설, 놀이터, 쉼터, 약수터까지 잘 정리되어 있어서 가족 단위로 찾기에 적당한 공원이다.

뿐만 아니라 40분가량 3.5㎞ 길이를 걸으며 풍경을 느낄 수 있는 단산 저수지 맨발산책로가 사랑을 받고 있다. 지금은 숲길이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경치만이 남아 있으나 이 물속에는 안타까운 역사가 담겨 있다. 봉무공원 내에 있는 단산지는 붉은 흙이 나왔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일제강점기이던 1932년에 만들어졌다. 당시 단산지 조성을 위해 봉무동 및 인근 주민 삼천여 명을 강제로 노역시켰다고 하니 슬픈 역사의 흔적도 함께 존재하는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는 호수에서 수상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과 오리배가 호젓하게 떠 있어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조류의 발 모양으로 생긴 단산지는 들쑥날쑥한 형태여서 걷기에 지루함이 없으며 산책로 여기저기에 벤치와 화단이 있어 힐링의 공간이 되는 수변공원이다. 단산지를 한 바퀴 돌다 보면 2014년 방영된 TV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촬영지가 나온다. 주인공 장재열 역할을 맡았던 배우 조인성이 물에 빠진 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한 것이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난 후 이곳에는 외지인들의 발길도 부쩍 많아졌다. 그래서 오히려 인근 주민들은 한산한 저녁에 봉무공원을 찾아 산책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가로등이 길 곳곳을 모두 비추다 보니 야간 산책에도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봉무공원 산책로에는 배변 봉투함이 별도로 있기 때문에 반려동물과 함께 산책 나오는 주민들을 배려하고 있다.2008년부터 대구광역시는 올레코스를 마련하기 시작해 4년에 걸쳐 모두 10개 길을 선보였다. 대구광역시가 지닌 문화유적지, 숲과 계곡, 마을 들판 길 등을 걸을 수 있어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 중 팔공산 올레 6코스가 바로 봉무공원 단산지로 가는 길이다. 고분군에서 시작하여 호수를 거쳐 봉무정에까지 다다르는 이 코스는 편도 7.2㎞로 그림 같은 풍경을 한가롭게 즐길 수 있어 어른부터 아이까지 세대를 넘어 좋아하는 길이다.

[나비가 날아다니는 봉무공원]

봉무공원으로 들어오는 길에는 팔공로 가로수인 마로니에가 줄지어 있어 이른바 대구 마로니에 거리로 각광받고 있다. 1982년 마로니에 550그루를 가로수로 심어 조성한 것이 해가 갈수록 운치를 더하는 것이다. 또한 봉무공원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시원하게 서 있어 무궁화동산과 함께 싱그러움의 미를 표현하고 있다. 1992년에 조성된 봉무공원은 족구, 배구, 테니스를 할 수 있는 체육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데다 2002년 4월 개장한 나비생태원과 2005년 7월 개관한 나비생태학습관, 2016년 9월 건립한 나비누리관 덕분에 모든 세대가 즐겨 찾는 공간이 되었다. 우선 공원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나비생태원의 경우 각종 나무와 2만 8,000여 본의 화사한 우리 꽃이 갖추어져 있어 애벌레에서 번데기, 나비까지 서식하는 광경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나비생태학습관에서는 국내외 300여 종의 나비가 표본으로 전시되어 있어 어린이들의 체험학습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특히 실제로 20여 종의 나비가 날아다니는 곤충생태관은 유리온실과 미세 방충망까지 갖추고 있는 등 나비 세상에 들어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비교적 최근 개장한 나비누리관은 도심 내 자연생태체험학습장으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무엇보다 도심에서 생활하는 우리에게 인간이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아감을 보여주는 정서교육의 장이자 생태체험의 공간이 되고 있다. 연중무휴이자 상시무료인 봉무레포츠공원은 이처럼 대구시민들에게 여가와 스포츠를 제공하는 곳이며, 대구 관광 스탬프 투어 장소이기도 하다.

[봉무동에 켜켜이 쌓인 역사]

봉무산업단지 조성을 위해 실시한 공사부지 내 문화재발굴 과정에서는 봉무동에 켜켜이 쌓인 역사가 확인되기도 했다. 2007년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의 유적 발굴조사 현장에서는 유구와 출토유물 등이 공개되었다. 봉무산업단지를 조사한 영남문화재연구원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독무덤과 청동검파부철검(靑銅劍把附鐵劍), 삼국시대 돌방무덤과 굽다리접시[고배(高杯)] 등이 발굴되었다. 출토된 유물의 중요성을 가늠해볼 때 봉무동에는 2세기 전후 이 일대 지배층이 묻혔다는 것이 영남문화재연구원의 판단이다. 또한 주거단지에 대해 벌인 시굴(試掘)조사에서도 청동기시대 유물에서부터 조선시대 유물이 다수 출토된 바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봉무동 일대가 고대·중세사에서 차지한 비중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원삼국시대 대표적인 유적으로 봉무토성이 있다. 이를 통해 이곳 봉무동에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다는 사실과 이 세력이 토성을 쌓을 정도로 강력한 대규모 집단이었음을 알게 한다. 약 350m의 길이로 높은 절벽과 언덕을 활용하여 쌓은 봉무토성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면서도 동북쪽에 5m의 성벽을 쌓아 올렸다. 현재 봉무토성은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돼 있다. 한편 봉무동에는 대구광역시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조선시대 서당이 있는데 이곳 또한 봉촌 최상룡과 관련이 있다. 봉무동에서 일찍부터 일가를 이루고 산 경주최씨들이 고종 2년이던 1865년에 독암서당(獨巖書堂)을 지었다.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는 독암서당에서 최상룡은 후학을 양성해 향촌의 인재를 키워냈다. 서당의 이름을 ‘독암’이라 한 것은 후삼국시대인 927년 고려 태조 왕건공산전투에서 견훤의 군사에게 패하고, 피신해 홀로 앉아 있었다는 ‘독좌암’이 서당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천년 전설의 독좌암(獨座巖)이 독암서당의 이름을 낳고, 봉무정의 봉황 이야기가 봉무동의 이름을 탄생시키니 이 마을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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