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1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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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奉別崔仲久歸漆溪 |
영어공식명칭 | A farewell poem to Choi-junggu, returning to Chilgy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11년 - 「봉별최중구귀칠계」이상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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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81년 - 「봉별최중구귀칠계」이상정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02년 - 「봉별최중구귀칠계」간행 |
배경 지역 | 「봉별최중구귀칠계」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성격 | 한시|근체시|칠언절구 |
작가 | 이상정 |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이상정이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의 최항진을 전별하며 지은 한시.
[개설]
이상정(李象靖)[1711~1781]은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다. 1735년(영조 11)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상정은 이황(李滉)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이재로 이어진 영남 이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최항진(崔恒鎭)[1738~1771)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출신으로, 이상정의 문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중구(仲久)이다. 호는 단고(丹皐)이다. 「봉별최중구귀칠계」에 나오는 칠계는 최항진의 고향 옻골마을을 말한다.
[구성]
「봉별최중구귀칠계」는 네 수(首)의 칠언절구로 이루어져있다.
[내용]
「봉별최중구귀칠계[헤어진 최중구가 칠계로 돌아가다]」를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제1수
세모황촌주엄문(歲暮荒村晝掩門)[세모의 외딴 마을 낮에 문이 닫혔는데]/한거계활지온존(寒居計活只溫存)[누추한 집 살림 속에 온화함은 남았어라]/
은근백리상심의(殷勤百里相尋意)[은근하여라 백리 길을 찾아와 주었건만]/괴핍기문여공론(愧乏奇聞與共論)[부끄럽네 함께 논할 식견이 부족함이]
제2수
미언절후핍진유(微言絶後乏眞儒)[은미한 말 끊긴 뒤에 참된 유자 없었으니]/기로망망현소추(歧路茫茫眩所趨)[기로에서 망막하게 나아갈 길 몰랐었네]/
진중성문수지결(珍重聖門垂旨訣)[진중한 성인께서 비결 전수하셨으니]/요종박약하공부(要從博約下工夫)[박문과 약례로써 공부를 해야 하네]
제3수
정언지론일공마(精言至論日攻磨)[정언과 지론으로 날마다 갈고닦아]/대의여금령략과(大意如今領略過)[대의를 이제 지금 이해하며 지났지만]/
차거절수근완색(此去切須勤玩索)[가거들랑 반드시 부지런히 완색하소]/전두관쇄기중다(前頭關鎖幾重多)[앞으로도 빗장이 몇 겹이나 채워졌나]
제4수
소소풍설사문심(蕭蕭風雪寺門深)[나부끼는 눈바람에 산사는 깊은데]/류수남귀안북림(流水南歸鴈北林)[유수는 남쪽으로 기러기는 북 숲으로]/
상면허다난료사(上面許多難了事)[상면에는 어려운 일 무수히 많을 테니]/세한무부백년심(歲寒毋負百年心)[세한에도 백년의 마음 저버리지 마시길]
[특징]
「봉별최중구귀칠계」 네 수(首)가 각각 운자를 가지고 있다. 제1수는 1·2·4구에 원(元)계열의 운자를, 제2수는 1·2·4구에 우(虞)계열의 운자를 쓰고 있다. 제3수는 1·2·4구에 가(歌) 계열의 운자를, 제4수는 1·2·4구에 침(侵)계열의 운자를 쓰고 있다.
[의의와 평가]
「봉별최중구귀칠계」는 네 개 칠언절구 시가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되어 만남에서부터 전별하기까지 내용과 정서를 기승전결로 잘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