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1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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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巖齋記 |
영어공식명칭 | Records of Dokamjae Hous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86년 - 「독암재기」최상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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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49년 - 「독암재기」최상룡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96년 - 「독암재기」간행 |
배경 지역 | 「독암재기」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성격 | 잡기류|기문 |
작가 | 최상룡 |
[정의]
조선후기 학자인 최상룡이 지은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있는 독암서당에 대해 쓴 기문.
[개설]
최상룡(崔象龍)[1786~1849]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자는 덕용(德容), 호는 봉촌(鳳村)이다. 최상룡은 달성(達城)의 강동(江洞)[현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출생했다. 최상룡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세상이 어지러워 분경(奔競)[엽관운동]이 심해짐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독암서당(讀巖書堂)[독암재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니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문전을 메웠다. 고을의 과거한 사람의 명부를 보관하는 사마소(司馬所)를 중수하고 향약의 세부지침을 만들어 자치제도를 확립하고 마을의 풍속을 규정했다. 당시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유치명(柳致明)·김익동(金翊東) 등과 경전과 예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경전(經典)의 주요 내용을 도시(圖示)[그림이나 도표 따위로 그려 보임]하여 맥락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성리학과 훈고학을 깊이 연구해 「사서변의(四書辨疑)」·「재이록(在邇錄)」·「소학췌의(小學贅疑)」·「계몽차의(啓蒙箚疑)」·「정주서변의(程朱書辨疑)」 등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저서로는 『봉촌문집(鳳村文集)』 22권이 있다.
[구성]
「독암재기(獨巖齋記)」는 서당 건립의 필요성, 독암서당의 구조와 의미, 독암서당 건립의 의의를 적고 있다.
[내용]
「독암재기」 요약 내용이다.
“옛날 당(黨)에는 상(庠)이라는 학교가 있고, 수(術)에는 서(序)라는 학교가 있고, 가(家)에는 글방이 있으니, 특별히 배움을 위하여 설치하였다. 장인이 공장에 거처하지 않으면 작업이 정밀해지지 않으니, 학문도 일정한 곳이 없으면 그 마음을 오로지 하고 공부를 지극히 할 수 있겠는가. 이 열 가구 남짓 좁고 작은 마을을 돌아보면 종전엔 공부를 할 만한 곳도 없었고, 사는 사람들도 가난하고, 공부하는 사람도 적었다. 하지만 오늘날 자질(子姪)들을 가르칠 만한 것은 매우 많고 멀고 가까운 사람들 중 배움을 청하는 자도 적지 않다.
마침내 한두 종족들과 여러 칸 집을 경영할 것을 계획해 만 1년 만에 이루었다. 동협(東夾)을 보인재(輔仁齋)라 하였으니 대개 벗들을 모아 인을 돕고자 하였고, 인(仁)은 동쪽에 속하기 때문이다. 서협(西夾)을 정의재(精義齋)라 하였으니 의리를 정밀히 연구함이 중요하고, 의(義)는 서쪽에 속하기 때문이다. 합하여 이름 하기를 독암서당(獨巖書堂)이라 하였다. 대개 왕건이 앉았던 독좌암(獨坐巖) 앞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마광(司馬光)의 독락원(獨樂園)의 의미를 취하였다. 독암서당을 지은 것은 시(始)는 진실로 사람을 만드는 것이고, 종(終)은 자기를 이루는 것이다.”
[특징]
「독암재기」에는 독암서당의 구조물에 대한 설명이 상세히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독암재기」는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2호인 독암서당의 건립과 의의에 대한 전말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