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1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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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The Origin of Geomsa-dong and Seok-d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입석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석배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12년 6월 1일 - 「검사동과 입석동의 유래」 입석동 주민 서봉수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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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검사동과 입석동의 유래」 -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 |입석동 |
성격 | 작품|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견훤|왕건 |
모티프 유형 | 지명유래담 |
[정의]
후삼국시대 공산전투로 인해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과 입석동 지명이 생겨난 이야기와 입석의 지명과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
[채록/수집 상황]
대구광역시, 택민국학연구원, 『대구지명유래총람』(대구광역시, 2009)
김기현, 『대구 동구의 오래된 이야기』(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문화원, 2013)
인터뷰(입석동 주민 서봉수, 남, 79세, 2012. 6. 1.)
[내용]
검사동(檢沙洞)과 입석동(立石洞)의 지명설화는 후삼국시대 고려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이 치른 공산전투와 연관되어 있다. 고려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패해 검사동 일대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왕건이 검사동의 금호강변 모래가 비단처럼 곱고 크기가 일정하다고 하여 금사(錦沙)라고 불렀다. 지금도 금샛벌. 금사리라 불리기도 한다. 훗날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모래를 일일이 헤아려야 한다”는 의미에서 비단 금(錦)자를 검사할 검(檢)자로 바꾸었고 그때부터 지명이 검사(檢沙)가 되었다고 한다.
공산전투 당시 왕건의 부하 장수들이 말총으로 큰 돌을 굴려서 견훤 군대를 견제했지만, 전투에서 패하자 그 바위를 그냥 두고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 지역을 선돌, 즉 입석(立石)이라 불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검사동과 입석동의 유래」의 주요 모티프는 공산전투에서 비롯된 지명유래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