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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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영어공식명칭 | Catholic Church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신우 |
[정의]
근대시기부터 현대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 보급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그리스도교파의 하나.
[개설]
천주교는 유일신인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는 종교이다. 천주교는 교황을 종교수장으로 두고 있으며 바티칸 교황청을 그 중심지에 두고 있다. ‘가톨릭’이라고도 부르며 개신교와 대응하여 ‘구교’라고 불리기도 한다. 천주교의 교리를 살펴보면, 하느님은 인간을 포함한 천지의 창조주인데,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로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택했고, 부활하여 성부인 하나님에게로 돌아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제 사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고 자신과 함께 생활하던 제자들인 12사도들에게 맡겼으며, 그 최고 책임을 사도 베드로에게 위임하였다. 서기 30년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기 그리스도교는 사도들의 열성적인 선교 활동으로 시리아, 그리스, 로마 등지로 신속하게 퍼져 나갔다. 천주교는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300여 년 가까이 혹독한 박해를 받았지만,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 마침내 313년 신앙의 자유를 얻었고, 곧이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천주교는 하느님은 하나이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位)를 가지고 있다. 이를 삼위일체(三位一體)라 한다. 또한 천주교에는 교회 안에 칠성사(七聖事)[예수가 정한 일곱가지 성사]가 있으며 이 중 성체성사(聖體聖事)는 최고의 성사이다. 이 성사가 미사에 집전되기 때문에 미사는 천주교인의 신앙과 신앙생활의 중심이 된다.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일본에 진출하여 있던 예수회는 스페인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Cespedes, G.)를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인 천주교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게 하였다. 세스페데스는 임진왜란 중에 조선에 들어와 일본군에게 천주교를 전파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포교 활동을 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와 천주교와의 만남으로는 볼 수는 없지만, 임진왜란 중 일반에 잡혀간 민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천주교로 개종한 것을 볼 때 의의가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수용되는 것은 중국을 통해서였다. 명말청초 시기 중국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진출해 있었다. 선교사들과 조선 사신과의 접촉 과정에서 천주교는 서학으로서 먼저 수용된다. 소현세자나 홍대용 등은 신부들과 접촉하였고, 그들을 통해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가지고 들어왔다.
1784년 이승훈은 자신의 아버지가 베이징[北京]에 사신으로 가게 되는 기회를 이용하여 교리서적을 구하고 교리를 배워 1784년 봄에 프랑스 출신 예수회의 그라몽(Grammont)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조선교회의 최초 세례자가 된다. 이승훈은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 등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승훈은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이들은 독자적인 교회가 불가능함을 알고 윤유일을 밀사로 1789년 말 동지사 편에 베이징으로 보냈다.
윤유일은 베이징에서 주교 구베아(Gouvea, A.de)를 만나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구베아는 이에 선교사를 보내기로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구베아의 건의를 받아들인 로마교황청에서는 구베아에게 조선 교회의 지도를 맡겼다. 그 결과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조선에 파견되었다. 주문모와 조선인 신자들의 활동으로 천주교는 교세를 확장했다. 그러나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는 조선 교회를 초토화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836년 이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고, 1837년에는 조선 교구의 제2대 교구장에 주교 앵베르(Imbert, L.M.J.)가 입국함으로써, 조선 교구는 독립교구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천주교는 정부의 탄압 대상으로 수많은 박해를 이겨내었다. 1785년 정조대 이른바 추조적발사건에서 증인이었던 김범우는 유배형을 받고 가는 중 죽음으로써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진산사건으로 불리는 신해박해, 1795년 주문모 신부 체포를 위한 을묘박해에서는 최인길, 윤유일, 지항 등이 사형을 당하였고 이가환, 정약용 등이 좌천되거나 유배되었다. 이러한 정조대 탄압은 정조의 교화정책 때문에 온건한 편이었다.
그러나 정조 사망 이후 세도정치 초기 신유박해에서는 노론벽파에 의해 정조 지지 세력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삼았다. 헌종 때에는 풍양조씨와 안동김씨 간의 세도 다툼으로 인하여 대규모 박해가 행해졌다. 기해박해로 세도정치기 조선에 입국해 활동하던 3명의 선교사가 모두 순교 당했으며,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 교회의 중요 인물이 모두 순교하였다.
그리고 개항 직전 대원군 집권 시기 병인박해가 있었다. 대원군은 초기에는 천주교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암시를 주었으며 천주교도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가 있던 베르뇌와 주교 다블뤼(Daveluy)[안돈이]가 서울[서울특별시]에 도착한 것은 약속보다 한 달이 지나서였고 그 가운데 대원군의 처지는 급격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 이유는 1866년 1월에 도착한 베이징 사신의 편지에서 영불연합군의 베이징 함락 이후 시작되었던 양인 살육의 사실이 보고되었다는 점에 있다. 청나라의 천주교 탄압의 소식은 반 흥선대원군 세력이 천주교와 접촉하고 있는 흥선대원군에게 정치적인 공세를 취하게 하였고, 이에 흥선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쇄국양이와 사교금압의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더구나 운현궁에도 천주교가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趙大妃)까지 천주교를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결심하였다.
병인년 초에 주교 베르뇌의 체포로 시작되어 불과 3개월 사이에 당시 조선에서 활동 중이던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과 남종삼 등 주도자들 거의 모두가 처형되었다. 이를 복수하기 위해 프랑스 함대가 서강까지 침입했다 하여 천주교도들을 양화진에서 수천 명을 처형하였다. 이후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 E.J.)에 의해 자행된 남연군묘 도굴 사건을 계기로 박해가 다시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탄압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지방으로 은둔하였으며, 비밀 모임을 통해 신앙을 지켜나갔다.
[대구광역시 천주교 역사]
경상도 지역에는 1760년경까지도 천주학이 전래되지 않았으며, 이황과 같은 인물이 배출되어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 예절을 알고 학문이 가득한 곳을 뜻함]을 자처하는 만큼 보수적인 경향이 강해서 새로운 사조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왔다. 하지만 서학의 경우 천주교의 수용과정에서 한국교회의 성립 이전에 신앙실천운동이 이 지역에서 먼저 있었다. 홍유한은 영남지방에서 처음으로 서학을 연구해 신앙으로 받아들인 첫 신자였으며,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행했던 곳이다. 이러한 점은 대구광역시 지역이 한국교회의 성립 이전에 신앙의 대상으로서 서학을 다른 지방보다 먼저 받아들인 곳으로서의 의의가 있다.
1815년 을해박해 때에는 이전에 형성된 신자촌인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등에서 체포된 신자 33명이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중 14명은 옥사, 7명이 참수당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 때에도 상주, 봉화, 안동 등지에서 체포되어 온 천주교 신자들이 대구 경상감영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들은 감옥 안에 갇혀서도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고, 이들에게 교리를 배워 스스로 천주교에 입교하는 예도 있다고 한다. 그중에는 대구광역시에서 살던 서용서[김수환 추기경의 외할아버지]도 있었다.
1830년에서 1835년 사이에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낙골에 살던 이재건과 그 가족들은 칠곡 신나무골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대구광역시 민묵골[전 애락원 부근]에 정착하여 대구광역시 지역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1836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나와서 비밀리에 포교 활동을 하는 가운데 대구광역시와 부근 지역의 공소에서 성사를 주었다.
1882년부터 로베르[한국명 김보록]신부가 강원도 원주의 부흥골에 있으면서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할 때 대구광역시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당시 대구광역시 지역 신자 수는 197명이었다. 이후 1885년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신나무골에 안착한 로베르 신부는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여행이 자유로워지자 본격적인 읍내 전교 활동을 하였다. 1888년 대구광역시 새방골에, 1891년에는 대구광역시 읍내의 남산[현 계산성당]으로 거처를 옮겨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 1948년 8월 29일 파리외방전교회는 서울과 대구교구를 온전히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위임하고 철수하였다. 한국인에 의한 자치교구로 성장한 대구교구는 바로 그해 12월 9일 최덕홍 신부가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949년 1월 30일 주교서품 및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대구교구는 성베네딕도 수도회에 칠곡, 성주, 선산 지역에 포교를 위촉하고 대리구를 설정하여 최덕홍 주교의 주최로 착좌식도 가졌다.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대표적 성당]
대구광역시 동구의 성당은 대구대교구 2대리구에 속해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에는 11개 성당[각산성당, 동촌성당, 반야월천주교회, 신서성당, 용계성당, 지묘성당, 효목성당, 복자성당, 신암천주교회, 천주교불로교회, 큰고개천주교회]과 2개 공소[천주교 동촌 성당 둔산 공소, 천주교 불로 성당 평광 공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