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6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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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到釜 |
영어공식명칭 | Nam Dobu |
이칭/별칭 | 하준수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추제협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등지에서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활동한 조선인민유격대 부사령관.
[가계]
남도부는 1921년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이 하준수(河準洙)인 남도부는 아버지 하종택과 어머니 이의영 사이에 3남 3녀 중 장남이었다. 아버지 하종택은 오랫동안 면장을 지냈으며 천석꾼 부자였다.
[활동 사항]
남도부는 진주고등학교의 전신인 진주중학교 3학년 때인 1937년에 일본인 교사를 폭행하여 퇴학당했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준일상업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이어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태평양전쟁이 반발하고 학도지원병제가 발표 후 남도부는 학도병으로 징집되자 이를 거부하고 귀국하여 지리산에 숨었다. 이렇게 남도부와 같이 징집을 거부하고 지리산으로 도망오는 사람들이 15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이들을 규합하여 항일결사단체인 보광당(普光黨)을 만들었다.
남도부는 일제의 패망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새생활운동’을 펼쳤으나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었고 여운형 주도의 조선인민당에 참여하여 함양군당 위원장을 맡았다. 남도부는 이때만 하더라도 인민당과 공산당이 합당하여 남로당을 만들 때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온건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 시대에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지리산에 숨어들게 되자 미군정의 정책에 대한 강한 반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며 빨치산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1949년에 조선인민유격대 창설에 가담하여 제3병단[동해여단] 부사령관을 맡았으며 6·25전쟁 당시에는 태백산과 일월산 일대에 유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에 부하였던 차진철의 밀고로 대구에서 체포되어 1955년 8월에 처형되었다. 서울 근교 수색에 있던 육군 사형집행장이었는데, 처형장에 입회했던 한 수사관의 말에 따르면 “그처럼 꿋꿋하게 품위를 지킨 사형수는 처음 보았다.”라고 한다.
[저술 및 작품]
남도부는 1946년 잡지 『신천지』에 「신판 임꺽정-학병 거부자의 수기」를 세 차례 기고했으며, 남도부의 노트 「비장문건(秘藏文件)」이 남아 있다.
[묘소]
남도부는 1955년에 처형된 후 남도부의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세월이 흐른 후 1979년 여름에 장례를 치르고 참나무로 만든 관을 묻어 가묘를 만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