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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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呂大翊 |
영어공식명칭 | Yeo daeik |
이칭/별칭 | 자고(子高),능천(綾泉)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상매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출생 시기/일시 | 1681년 - 여대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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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42년 6월 26일 - 여대익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78년 - 여대익 공조 참판에 추증 |
출생지 | 여대익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상매동 |
묘소|단소 | 여대익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사당|배향지 | 여대익 배향지 - 경상북도 경산시 |
성격 | 효자|문인 |
성별 | 남성 |
본관 | 성산 |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상매동 출신 효자이자 문인.
[가계]
여대익의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자고(子高), 호는 능천(綾泉)이다. 아버지는 여상제(呂尙齊), 어머니는 강양이씨(江陽李氏)로, 숙달(叔達)의 딸이다.
[활동 사항]
1681년(숙종 7)에 대구광역시 동구 상매동 송하(松下)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부모님에게 드렸다. 스승에게 『소학』과 『효경』을 배웠는데, 사람이 되는 도리가 『소학』과 『효경』에 있다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성장해서는 아버지가 병이 들자 밤낮으로 북두성에 기도했으며,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관찰했고, 손가락에 피를 내어 아버지에게 먹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통곡하다가 여러 번 기절했고, 시묘살이할 때 꿇어앉아 절하는 곳에 풀이 자라지 않고, 직접 심은 소나무에는 벌레가 침범하지 않았다. 삼년상을 마치고도 애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어 여막 서쪽에 영모재(永慕齋)라는 재실을 지은 뒤에 아침·저녁으로 성묘하고 여가에는 경전을 탐구하였다. 어머니 봉양을 위해 영모재 옆에 만수당(萬壽堂)을 지은 뒤에 요리 기구를 설치하고 직접 요리를 하자, 호랑이가 노루를 잡아 오고 꿩이 날아드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경산 현감 윤지(尹榰), 이경(李坰), 유유(柳愈)가 여대익에게 음식을 보내왔고, 상국 홍우전(洪禹傳)과 박문수(朴文秀)는 조정에 여대익의 효를 알려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게끔 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상례 때와 똑같이 하였다. 1742년(영조 18) 6월 26일에 평소 앓던 등창이 심해져 세상을 떠나니, 향년 62세였다.
[묘소]
여대익의 묘소는 경산 북쪽 능천(綾泉)[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능천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여대익은 1878년(고종 15) 공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경상북도 경산(慶山)에 있는 송호서원(松湖書院)에 제향되었다.
[학문과 저술]
여대익의 저술로는 4권 2책의 『능천집(綾泉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