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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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興建 |
영어공식명칭 | Choe Heungche |
이칭/별칭 | 입부(立夫),육와(陸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인진 |
출생 시기/일시 | 1712년 12월 23일 - 최흥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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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69년 7월 23일 - 최흥건 사망 |
출생지 | 최흥건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묘소|단소 | 최흥건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연지동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출신 문인.
[가계]
최흥건(崔興建)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는 입부(立夫), 호는 육와(陸窩)이다. 최흥건은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병조판서에 오른 뒤 광정(匡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최단(崔鄲)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郎)을 지낸 최경함(崔慶涵)이고, 할아버지는 감찰(監察)을 지낸 최수학(崔壽學)이며, 아버지는 통덕랑을 지낸 최정석(崔鼎錫)이다. 어머니는 진사 조숭(趙崈)의 딸인 함안조씨(咸安趙氏)이다.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둘째 동생이다. 부인은 권빈(權䎙)의 딸인 안동권씨(安東權氏)인데 슬하에 두 아들 최항진(崔恒鎭), 최화진(崔華鎭)과 권소(權熽)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활동 사항]
최흥건은 효행이 지극하였고, 맏형 백불암(百弗庵) 최흥원과 우애가 극진하였으며, 일상생활은 예법에 따랐다. 아내와는 화목하면서도 예법을 지켰고,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과 같이[상경여빈(相敬如賓)] 하였다. 평일에 성급한 말이나 화내는 안색을 짓지 않았고 재물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의리를 중시하였다. 스스로 육육와(陸陸窩)라고 호를 지었으니, 대개 거백옥(蘧伯玉)이 “나는 나이 육십이 되어 예순 번이나 잘못된 점을 고쳤다[행년육십이육십화(行年六十而六十化)].”라는 뜻을 취하였다.
[학문과 저술]
최흥건은 『소학』과 『대학』을 배우고, 다시 반복해서 사서(四書), 『심경』, 『근사록』, 『주자서절요』 등을 읽어서 덕(德)에 나아가는 차례를 깨달았다. 집안에서 맏형 최흥원·둘째형과 학문을 강구하고 진리에 대하여 논변하였으며, 밖으로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형제와 함께 공부했다. 저서로 『육와유집(陸窩遺集)』 4권 2책이 있다.
[묘소]
최흥건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광리(廣里)[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에 있었으나, 경상북도 경산시 연지동(蓮池洞)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