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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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興漸 |
영어공식명칭 | Choe Heungjeom |
이칭/별칭 | 진숙(進叔),초려(草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인진 |
출생 시기/일시 | 1709년 4월 4일 - 최흥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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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71년 6월 20일 - 최흥점 사망 |
출생지 | 최흥점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묘소|단소 | 최흥점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출신 학자.
[가계]
최흥점(崔興漸)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는 진숙(進叔), 호는 초려(草廬)이다. 최흥점은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병조판서에 오른 뒤 광정(匡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최단(崔鄲)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郎)을 지낸 최경함(崔慶涵)이고, 할아버지는 광양 현감(光陽縣監)을 지낸 최수학(崔壽學)이며, 아버지는 통덕랑 최정석(崔鼎錫)이다. 어머니는 진사 조숭(趙崈)의 딸인 함안조씨(咸安趙氏)이다.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의 아우이다. 부인은 통덕랑 이시성(李時成)의 딸인 고성이씨(固城李氏)인데, 슬하에 세 아들 최사진(崔思鎭), 최상진(崔尙鎭), 최우진(崔宇鎭)과 김준행(金駿行), 이정국(李禎國), 박문덕(朴文德), 김이구(金履九)에게 출가한 네 딸을 두었다.
[활동 사항]
최흥점은 일찍이 할아버지의 유명(遺命)으로 백부 최인석(崔麟錫)의 아들로 출계(出系)하여 당대 제사를 잘 받들었다. 평소 뜻을 드러내 보이면서 의리에 맞는 행동을 하여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맏형 최흥원과 우애가 극진하여 난형난제로 칭송받았다. 최흥점이 사망하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만사 「만최진숙흥점(挽崔進叔興漸)」를 지었는데 한 구절을 보면 “백중 형제 마주하여 진정한 교분 이루었고, 이웃과 문을 닫고 아이의 마음 지켰네[대상백중성지기 폐호향린수약아(對牀伯仲成知己 閉戶鄕鄰守若兒)]”라 하였다. 두와(蠹窩) 최흥벽(崔興璧)이 최흥점의 「유사(遺事)」를 지었다고 하였으나 『두와문집(蠹窩文集)』에는 실려 있지 않다.
[묘소]
최흥점의 묘소는 해북촌(解北村) 광리(廣里)[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