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5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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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象龍 |
영어공식명칭 | Choe Sangryong |
이칭/별칭 | 상성(象性),덕용(德容),봉촌(鳳村),최상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인진 |
출생 시기/일시 | 1786년 9월 1일 - 최상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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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849년 9월 27일 - 최상룡 사망 |
출생지 | 최상룡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강동마을 |
묘소|단소 | 최상룡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활동한 문인.
[가계]
최상룡(崔象龍)[1786~1849]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초명은 상성(象性), 자는 덕용(德容), 호는 봉촌(鳳村)이다. 최상룡은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병조판서에 오른 최단(崔鄲)의 후손이다. 최단의 시호(諡號)가 광정(匡靖)이므로 이 집안은 광정공파(匡靖公派)라 불린다. 최단의 세손 최동집(崔東㠎)이 1616년(광해군 9) 대구 칠계(漆溪)[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로 이주하여 세거함으로써 옻골최씨가 되었다. 최상룡의 증조할아버지는 최수형(崔壽衡)인데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증직(贈職) 받았고, 할아버지는 최현석(崔玄錫)이며, 아버지는 최흥한(崔興漢)이다. 어머니는 신광준(辛光俊)의 딸인 영산신씨(靈山辛氏)이다. 부인은 손잉구(孫仍九)의 딸인 경주손씨(慶州孫氏)와 박성봉(朴成鳳)의 딸인 밀양박씨(密陽朴氏)인데, 슬하에 네 아들 최의발(崔義發), 최윤발(崔潤發)[출계], 최경발(崔慶發), 최수발(崔秀發)과 정내진(鄭來振), 조한규(曺翰奎), 이종하(李鍾夏)에게 출가한 세 딸이 있다.
[활동 사항]
최상룡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겨우 말을 알아들을 쯤에 어른들이 입으로 글자를 가르쳐주면 문득 암송하여 잊어버리지 않았다. 7세에 『십구사략』을 읽었고, 20세 때 족형 칠실(漆室) 최화진(崔華鎭) 문하에 나아가 「심경」, 「근사록」, 「도산십도(陶山十圖)」 등의 수업을 받았다. 이어서 최화진의 추천으로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온 마음은 쏟아서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봉촌은 37세 때인 1822년(순조 22)에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유학하였으며, 1827년(순조 27)에 천주교인 이경언(李景彦)의 처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향리에 독암서당(讀巖書堂)을 지어 후학 양성에 힘써서 배극소(裵克紹), 남수명(南守明), 이진용(李震容)을 비롯한 여러 문인을 배출하였다. 만년에 봉무정(鳳舞亭)을 지어서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원근의 여러 벗과 학문을 강론하며 예를 익히고, 마을 사람들에게 권선징악을 강조하며 착한 풍속을 장려하였다.
[학문과 저술]
경술(經術)로 이름이 났던 최상룡의 시문집은 1893년(고종 30) 후손 최영환 등이 편집하여 『봉촌선생문집』이라는 이름으로 22권 11책이 간행되었다. 최상룡의 글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잡저에 편성된 것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종약(宗約)」은 백불암 최흥원(崔興遠)이 약정(約定)한 종법을 참고하여 강동(江洞) 종중의 규약을 정한 것이고, 「경서팔도(經書八圖)」는 사서사경(四書四經)의 대지(大旨)를 8종 도표로 집약하였다. 「소학췌의(小學贅疑)」는 이수호(李遂浩)의 「소학집주증해(小學集註增解)」를 읽고 자신의 뜻을 붙인 것이고, 「사서변의(四書辨疑)」는 사서의 주석서이다. 「계몽차의(啓蒙箚疑)」는 「역학계몽(易學啓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고, 「재이록(在邇錄)」은 수신제가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특히 『봉촌문집』에는 「봉무정십경(鳳舞亭十景)」이 실려 있어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풍경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 있다.
[묘소]
최상룡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해서부(解西部) 대명택(大明澤) 북록(北麓)[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있는데, 묘표(墓表)는 경상도관찰사 김학성(金學性)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