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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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先見 |
영어공식명칭 | Chae Seongyeon |
이칭/별칭 | 명보(明甫),양전헌(兩傳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출생 시기/일시 | 1574년 1월 15일 - 채선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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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7년 - 채선견 사마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채선견 이괄의 난에 의병을 일으킴 |
활동 시기/일시 | 1626년 - 채선견 희릉참봉에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44년 10월 10일 - 채선견 사망 |
거주|이주지 | 채선견거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수학|강학지 | 채선견 강학지 -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
수학|강학지 | 채선견 강학지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묘소|단소 | 채선견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내동 |
성격 | 문인 |
성별 | 남성 |
본관 | 인천 |
대표 관직|경력 | 희릉참봉 |
[정의]
조선 중기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출신의 문인 학자.
[개설]
채선견은 지산 조호익과 한강 정구 양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익혔고, 영남유생들과 함께 이이첨의 주참(誅斬)을 청하는 소를 직접 작성하여 올렸으며, 이괄(李适)의 난 때는 의병을 일으켰으나 난이 평정되어 모은 군량을 나라에 헌납하기도 하였다.
[가계]
채선견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명보(明甫), 호는 양전헌(兩傳軒)이다. 고려 중엽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채선무(蔡先茂)의 후손으로, 조부는 채홍(蔡泓), 부친은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모친은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신관(申寬)의 딸이다. 첫째 부인은 최씨로 자식이 없었고, 둘째 부인은 길안임씨(吉安林氏)로, 임순(林荀)의 딸이다. 채임(蔡栠)과 채기(蔡杞) 두 아들을 두었다.
[활동 사항]
채선견은 1574년(선조 7) 1월 15일에 태어났다. 11세 때 부친이 돌아가시고, 약관에 모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한편, 금호강 서쪽 산기슭에 부친이 세운 압로정(狎鷺亭)과 소유정(小유亭)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중에 소실되고 땅마저 타인의 소유가 되었다. 그래서 1609년(광해군 1)에 아우들과 힘을 모아 소유정을 중수하고 형제들이 날마다 여기에 모여 술 마시고 시를 지으며 형제의 우애를 다졌다. 이후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고, 또 사수(泗水)에 나아가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찾아뵙고 학문을 익혔다. 이때부터 양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하는 큰 방법을 배웠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양전헌(兩傳軒)’을 지은 뒤에 양 선생의 도를 부지런히 익혔다.
1617년(광해군 9)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당시 조정이 혼란하고 시사가 날마다 그릇되는 것을 보고 출사의 마음을 접고 두문불출하며 당세에 대한 생각을 끊었다. 하지만 이이첨(李爾瞻)의 하는 짓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지경에 이르자, 1621년(광해군 13)에 영남 유생들과 함께 이이첨의 주참(誅斬)을 청하는 소를 직접 작성하여 올렸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전 현감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토벌에 참여하기 전에 난이 평정되어 모은 군량을 나라에 헌납하였다. 그 뒤 이이첨의 여당 오적(五賊)을 참하기를 청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626년에는 절의로서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어 잠시 상경했다가 곧장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미대(美岱)[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성재정(盛才亭)[지금 성재서당]을 지어 만년의 안식처로 삼았다. 채선견은 날마다 이웃의 벗들과 함께 역사를 강론하고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또 좋은 계절에는 산수 자연을 유람하며 세상의 근심을 잊었다. 이때 함께 한 벗은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지암(止巖) 도신수(都愼修),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 대암(臺巖) 최동집(崔東㠍) 등이다. 1644년(인조 22) 10월 10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1세였다.
[학문과 저술]
채선견은 지산 조호익과 한강 정구 양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하는 큰 방법을 알았으며, 평생 역사서와 성리학을 깊이 탐구하였다. 특히 『춘추』를 즐겨 읽어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처벌해야 한다는 의리에 대해 분명하였다. 훗날 이이첨을 참살하라는 소를 직접 작성하여 올리는 등 자신이 배운 춘추의리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저술로는 2권 1책의 『양전헌집』이 있다.
[묘소]
채선견의 묘소는 대구부 해북촌(海北村) 내동(內洞)[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내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