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선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0579
한자 蔡先修
영어공식명칭 Chae Seonsu
이칭/별칭 경중(敬仲),달서재(達西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동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8년연표보기 - 채선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4월 - 채선수 팔공산의진군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596년 4월 - 채선수 이눌과 최동보와 함께 팔공산의 왜적 토벌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채선수 곽재우 휘하에 들어가 화왕산성을 지킴
몰년 시기/일시 1634년 2월 17일연표보기 - 채선수 사망
출생지 채선수 출생지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수학|강학지 채선수 수학지 -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수학|강학지 채선수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묘소|단소 채선수 묘소 - 대구광역시 서구 상리동
성격 문인
성별 남성
본관 인천

[정의]

임진왜란 당시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운 문인 학자.

[가계]

채선수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경중(敬仲), 호는 달서재(達西齋)이며, 고려 때 금성백(錦城伯)에 봉해진 채보문(蔡寶文)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채윤주(蔡胤周), 할아버지는 채징찰(蔡澄察), 아버지는 채응원(蔡應黿),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훈도(訓導)를 지낸 권사공(權士恭)의 딸이다. 부인은 제주고씨(濟州高氏)로, 고윤종(高胤宗)의 딸이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채모(蔡模)·채해(蔡楷)·채추(蔡樞)이며, 딸은 구인계(具仁繼)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채선수는 1568년(선조 1)에 대구부 서쪽 달성리(達城里)[지금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에서 태어났다. 4살 때 백부인 추월(秋月) 채응룡(蔡應龍)에게 입양되었다. 1573년(선조 6) 6세 때 처음으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에게 수학하였다. 채선수는 어려서부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1577년(선조 10)에 종조 숙부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에게 『대학』을 배웠고, 이듬해인 1578년(선조 11)에 재종제 금탄(琴灘) 채선길(蔡先吉), 양전헌(兩傳軒) 채선견(蔡先見)과 함께 압로정(狎鷺亭)에서 『중용』을 읽었다. 1586년(선조 19) 19세 때 귀연재(龜淵齋)에서 『주역』을 읽고, 얼마 뒤에 회연(檜淵)에서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찾아갔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켜 대구 팔공산의진(八公山義陣)에 나아가 창석(蒼石) 이준(李埈), 백운(白雲) 권응수(權應銖) 등과 함께 팔공산 남쪽을 지켰다. 1596년(선조 29)에 여러 의병장과 함께 팔공산에서 회맹을 하고, 4월에 이눌(李訥)과 최동보(崔東輔)와 함께 정예병 800명을 이끌고 팔공산의 왜적을 토벌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휘하에 들어가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며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날마다 경전과 역사서를 강마했고, 또 모당 손처눌과 교유하면서 의리에 대해 연구하였다. 1634년(인조 12) 2월 17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7세였다.

[학문과 저술]

채선수가 남긴 3권 1책의 「달서재집(達西齋集)」이 있다.

[묘소]

채선수의 묘소는 대구부 서쪽 신방동(新坊洞) [지금 대구광역시 서구 상리동]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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