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몽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0574
한자 蔡夢硯
영어공식명칭 Chae Mongyeon
이칭/별칭 정응(靜應),투암(投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동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1년연표보기 - 채몽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채몽연 임진왜란 당시 공산의진군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채몽연 화왕산성 회맹에 참여함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채몽연 이괄의 난 때 의병을 일으킴
몰년 시기/일시 1638년 7월 25일연표보기 - 채몽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11년 - 채몽연 소암서원에 배향
수학|강학지 채몽연 수학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수학|강학지 채몽연 강학지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묘소|단소 채몽연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사당|배향지 채몽연 배향지 -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성격 문인
성별 남성
본관 인천
대표 관직|경력 수성북면장

[정의]

임진왜란 당시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의진군 수성북면장을 지낸 문인 학자.

[가계]

채몽연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정응(靜應), 호는 투암(投巖)이다. 고려 말에 호조전서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절의를 지켜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한 채귀하(蔡貴河)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채면(蔡沔), 아버지는 채정국(蔡定國)이다. 부인은 죽산박씨(竹山朴氏)로, 박배(朴培)의 딸이고, 채무(蔡楙), 채빈(蔡椕) 두 아들이 있었다.

[활동 사항]

채몽연은 1561년(명종 16)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경』 「관저편(關雎篇)」, 『대학』을 외웠다. 1582년(선조 15)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학했는데, 정구로부터 학문하는 요체 다섯 조목을 받고 크게 깨달아 이를 평생 마음에 새겼다. 이때 『소학』, 『심경』, 『주자서절요』등의 서적을 밤낮으로 부지런히 읽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과 함께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팔공산 부인사(符印寺)에 모여 여러 읍에 격문을 전하여 향병을 모집하였다. 이때 결성된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에 참여하여 수성북면장(壽城北面將)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에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가 방어사로 있던 창녕[지금 경상남도 창녕군]의 화왕산성(火王山城)에서 가서 회맹에 참여하였다.

1605년(선조 38)에는 선사(仙査)에서 학생들을 모아 『근사록』을 강론했고, 1613년(광해군 5)에는 연경서원(硏經書院)에서 강회를 열었다. 이듬해인 1614년(광해군 6)에 한강 정구가 사양(泗陽)으로 거처를 옮기자, 자주 왕래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1620년(광해군 12) 1월에 한강 정구가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 3년을 행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괄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의 양식을 헌납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아들 백포(柏浦) 채무(蔡楙)에게 의병을 일으켜 나아가게 하였다. 1638년(인조 16) 7월 25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학문과 저술]

채몽연이 남긴 7권 2책의 『투암집(投巖集)』이 있다.

[묘소]

채몽연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마천산(馬川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채몽연은 1711년(숙종 37)에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의 소암서원(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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