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5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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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翼龍 |
영어공식명칭 | Lee Ikryong |
이칭/별칭 | 이오(而五),술효(述孝),요산당(樂山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출생 시기/일시 | 1732년 7월 7일 - 이익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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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74년 - 이익룡 요산당 건립 |
몰년 시기/일시 | 1794년 3월 - 이익룡 사망 |
출생지 | 이익룡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묘소|단소 | 이익룡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
성격 | 문인 |
성별 | 남성 |
본관 | 영천 |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출신 문인 학자.
[가계]
이익룡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이오(而五), 호는 요산당(樂山堂)이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의 9대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이언직(李言直), 할아버지는 이형천(李亨天), 아버지는 이재춘(李載春)이다. 한편 친아버지는 이항춘(李恒春)이며, 친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로, 서선(徐渲)의 딸이다. 첫째 부인은 옥산장씨(玉山張氏)로 장기옥(張起玉)의 딸이며, 둘째 부인은 문화유씨(文化柳氏)로 유덕후(柳德垕)의 딸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동간(李東榦)·이동근(李東根)·이동규(李東奎)이며, 첫째 딸은 윤처대(尹處大), 둘째 딸은 서익(徐杙)에게 시집을 갔다.
[활동 사항]
이익룡은 1732년(영조 8) 7월 7일에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대암리(臺巖里)에서 태어났다. 엄경하(嚴慶遐)는 이익룡을 보고 “이 아이의 눈썹과 눈을 보니 비범하다.”라고 말하면서 즉석에서 ‘천상석기린(天上石麒麟)’이라는 5자를 써서 주었다. 5세에 할아버지 이형천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7세에는 아버지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웠다. 11세에 아버지가 별세하자 여막을 짓고 거처했는데, 조문하는 손님에게 직접 글을 써서 답례하였다.
한편, 이익룡은 문예가 빨리 성취되어 13세에 향시에 합격했는데, 시권을 본 자들이 모두 “다시 왕자안(王子安)[왕발]의 재주를 보게 될 줄이야…….”라고 탄식하였다. 1755년(영조 31)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나, 큰형과 함께 나란히 합격하는 바람에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때부터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날마다 『소학』을 읽기 시작해 평생을 읽었다고 한다. 또한 『예기』 중에 부모를 섬기는 것과 관련된 여러 조목을 초록하여 좌우명으로 삼고, 「경재잠(敬齋箴)」과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두 편을 도식화해서 격언으로 삼았다. 1774년(영조 50)에 요산당(樂山堂)을 지어 노년을 보낼 장소로 삼았다. 1794년(정조 18) 3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3세였다.
[학문과 저술]
이익룡은 만년에 요산당(樂山堂)을 지어 학문연마에 매진하여 『귀감록(龜鑑錄)』을 지어 성율(聲律)[한자의 성조인 사성(四聲)의 규율]과 역수(曆數)[천체의 운행과 기후의 변화가 철을 따라서 돌아가는 순서]의 묘리를 연구하였다. 선대의 유문을 모아 추원보본(追遠報本)[자기가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음]의 정성을 지극히 했다. 주자와 퇴계의 편지 중에 심성이기(心性理氣)와 관련된 부분을 초록해서 부지런히 탐구하였다. 또 조선 제현의 시문을 모아 『속염락(續濂洛)』을 만들고, 퇴계 이황의 시 수십 편을 뽑아 『속아송(續雅誦)』을 만들었다. 또 『소학도찬(小學圖贊)』, 『심경의전(心經疑傳)』, 『주서석의(朱書釋義)』, 『예설통편(禮說通編)』 등을 저술하였다. 이 밖에 저서로 『요산당집(樂山堂集)』이 있다.
[묘소]
이익룡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고모산(顧母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익룡 사후 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遠) 및 많은 선비들이 ‘술효(述孝)’라는 사시(私諡)[문장과 도덕이 뛰어난 선비이나 지위가 낮아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지 아니할 때, 그 선비에게 친척, 고향 사람, 제자들이 올리던 시호]를 붙여서 이익룡을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