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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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碩老 |
영어공식명칭 | Nam Seokro |
이칭/별칭 | 백휘(伯輝),예연(禮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출생 시기/일시 | 1729년 - 남석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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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53년 - 남석로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754년 - 남석로 증광시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774년 - 남석로 사망 |
출생지 | 남석로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
부임|활동지 | 남석로 부임지 -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
부임|활동지 | 남석로 부임지 - 강원도 회양 |
묘소|단소 | 남석로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대암동 |
성격 | 문무관인 |
성별 | 남성 |
본관 | 영양 |
대표 관직 | 경양역승|만경현령|은계찰방 |
[정의]
조선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출신 문관.
[가계]
남석로의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백휘(伯輝), 호는 예연(禮淵)이다. 아버지는 남명신(南命新), 어머니는 영천이씨(永川李氏)로, 이수천(李壽天)의 딸이다. 배우자는 일직손씨(一直孫氏)로, 손경림(孫慶臨)의 딸이다.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남운기(南雲紀)이고, 장녀는 최경회(崔景晦)에게, 차녀는 서상복(徐相復)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남석로는 1729년(영조 5)에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에서 태어났다. 8세 때 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53년(영조 29)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754년(영조 30) 증광시에 급제한 뒤에 경양역승, 만경 현령, 은계 찰방 등을 역임하였다.
경양역승으로 있을 때 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자 소를 빌려주어 농사를 돕고, 봉급을 줄여 양식을 대주어 백성들이 농사를 그만두지 못하게 하였다. 또 만경현령으로 있을 때 연이은 기근으로 고달프고 곤궁한 백성들이 길에 가득차자, 남석로는 이들을 위로하여 안정시키고, 심지어 솜과 녹봉을 보내어 조금이라고 백성을 구제하였다. 또 병풍에 「팔탄시(八歎詩)」를 써서 상심하는 마음을 담았다. 은계찰방으로 있을 때 옛 관례를 준수하여 역참에 돌던 역병을 모두 없앴다. 뿐만 아니라 일을 처리할 때 한결같이 옛 관례대로 처리하였다.
하루는 갑자기 가슴이 뛰고 불안한 생각이 들자, 그날 즉시 행장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 남명신이 이미 역병에 걸린 지 여러 날이었다. 남석로가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으나 결국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 절차를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따랐다.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 무학동(舞鶴洞)에 집을 짓고 ‘사이(四而)’라는 편액을 달았다. 이곳에서 원근의 선비들과 날마다 경전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고 산수 자연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1774년(영조 50)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46세였다.
[학문과 저술]
남석로는 가학을 계승하고 백불암 최흥원의 문하에서 절차탁마하여 도량을 성취하였다. 일찍이 사관으로 경연에 참석했을 때 영조가 남석로에게 『맹자』를 읽도록 하였다. 남석로가 한 번 읽어내려 가자, 영조는 “매우 뛰어난 선비다.”라고 하며 병풍에 남석로의 성명을 써두었다. 이후 영조는 『어제훈서(御製訓書)』 한 질과 많은 종이와 비단 등을 남석로에게 하사하였다. 남석로가 지은 저술이 많은데 여러 번 상난(喪難)을 겪으면서 대부분 흩어져 사라졌다. 증손 남형일(南衡馹)이 남은 시문을 수습하여 남석로와 남형일의 아버지 남명신의 유문과 합철하여 『석문세고(石門世稿)』로 간행하였다.
[묘소]
남석로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대암동(臺巖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