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3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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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공식명칭 | Korean War |
이칭/별칭 | 육이오전쟁,한국전쟁,한국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6·25전쟁 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9일 이후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이 체결되기 전까지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전개된 전쟁 양상.
[역사적 배경]
6·25전쟁 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의 체결까지 진행된 전쟁이었다. 북한군은 전쟁 개시 4일 만에 서울[서울특별시]을 점령하고, 계속 남진하였다. 그 사이 유엔에서는 6·25전쟁 참전을 결정하고, 1950년 7월 5일 미군 1개 대대와 포병대가 처음으로 참전하였다. 1950년 7월 9일 대구광역시에 미8군 사령부가 설치되고,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맥아더 장군이 임명되었다. 이로써 내전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국제전쟁으로 성격이 바뀌어갔다. 1950년 8월 1일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Walker Line)을 구축하였다. 낙동강방어선은 경상남도 마산시 서남쪽 진동을 기점으로 하여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을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경상북도 김천시, 경상북도 상주시, 경상남도 함창군에서 경상북도 예천군, 경상북도 안동시, 경상북도 영덕군을 잇는 선으로 남북 약 135㎞, 동서 약 90㎞에 걸친 것이었다. 이른바 부산교두보라고 하기도 한다. 낙동강방어선에서는 1950년 8월과 9월, 두 달 동안 남한과 북한이 전쟁의 승패를 걸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 팔공산을 배경으로 한 정규전과 비정규전이 벌어졌기에 낙동강방어선은 대구광역시 동구와 관련성이 크다.
[경과]
1950년 7월 14일에 육군본부가 대구시[대구광역시]로 이전하였고, 1950년 7월 16일 한국 정부는 대전시를 거쳐 대구시로 이동하였다. 대구 시내 주요 시설은 군사시설로 활용되었다. 대구역에는 많은 피난민이 유입되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대구시내 여러 곳에 피난촌이 형성되었다. 거리에는 강제 징집을 위한 가두검문이 실시되고, 자원입대하는 청년들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대구방면으로 내려오는 인민군을 보면, 인민군 제10사단은 1950년 7월 10일 전라북도 무주군을 거쳐 경상북도 성주군 방면으로 향했다. 중부지방에서는 충청북도 충주시를 점령한 공산군 제1사단이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경상북도 문경시, 경상북도 점촌시[지금 경상북도 문경시]를 거쳐 경상북도 군위군, 대구시 방면으로 향했다. 제13사단은 경상북도 상주시를 거쳐 낙동강 상류를 건너 경상북도 칠곡군, 대구시로 향했다. 당시 내무부장관 조병옥의 대구사수 주장과 1950년 8월 중순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작전이 시민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경상북도 군위군 방면 팔공산까지 점령하고, 인민군의 박격포탄 3발이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2가 판자촌에 떨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대구시가 위태롭게 되자 정부는 다시 부산시[부산광역시]로 이동을 시작하였고, 대구시는 소개령이 내려졌으나 곧 취소되었다.
1) 동구 지역을 지켜낸 대구지구방어사령부
대구광역시 동구는 낙동강방어선 작전에 힘입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다. 특히, 왜관-다부동전투, 가산·팔공산전투, 신령전투, 창녕-영산전투 등에서 아군이 적군을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면서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군은 대구지구방어사령부를 구성하였다. 대구지구방어사령부는 대구 방위계획을 세웠다. 국군을 주축으로 각 기관이 임무를 분담하여 방위에 만전을 기하는 계획이었다. 경기도와 충청남도 경찰은 팔공산지구를, 서울시 경찰병력은 경상북도 칠곡군 방면을, 충청북도 경찰은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방면을, 경상북도 경찰은 경상북도 청도군 및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 방면으로, 강원도 경찰은 경상북도 청송군 방면으로 각각 배치되어 국군과 더불어 대구시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2) 동촌비행장에 설치된 미 제5공군 사령부의 공중권 장악과 빨치산 토벌 작전
6·25전쟁 중 동촌비행장에는 미 제5공군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미 제5공군 사령부의 주요 임무는 38선 이북에 대한 폭격, 유엔군과 국군의 전선과 후방 빨치산 토벌작전에 대한 공중지원 작전이었다. 1950년 10월 미 제8군 사령부가 서울로 이동하자 이어 미 제5공군 사령부도 서울시로 이동하였다. 또한 동촌비행장은 미 공군의 K2기지로 활용되었다. 1953년 3월 초 동촌비행장에서는 한국공군 참모총장 최용덕(崔用德) 등 한국공군 수뇌부와 미극동군사령관 웨이랜드 대장, 제5공군사령관 바커스 중장, 미 전공군참모총장 스파스 대장이 참석한 가운데 군사비밀회담이 개최되었다. 그 결과 1953년 7월 2일 동촌비행장에서 한국 공군은 미국 공군으로부터 F-51D전투기[일명 무스탕전투기] 10기를 인수하였다. F-51D 무스탕전투기는 한국 공군이 보유한 첫 전투기였고, 인수 다음 날 1953년 7월 3일 첫 출격이 이루어졌다. F-51D 무스탕전투기는 6·25전쟁뿐 아니라 F-86F가 도입될 때까지 한국 공군의 주력기로 자리 잡았다.
3) 동구 팔공산 일대 비정규공산군의 빨치산 활동
6·25전쟁 중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팔공산은 비정규공산군, 이른바 빨치산의 활동 무대였다. 팔공산에는 남조선노동당 경북도당을 거쳐 조선노동당 경북도당이 있었고, 비정규 4지구당이 주요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고 있었다. 6·25전쟁 말기에는 남도부 부대의 근거지로 활용되었다. 남도부가 체포되면서 팔공산에서의 빨치산 활동이 거의 종지부를 찍었다.
[결과]
대구광역시 동구는 유엔군과 국군이 1950년 8월 1일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해 방어했기 때문에, 전투로 인한 직접적인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그렇지만 팔공산에서 비정규 공산군[빨치산]과의 전투가 벌어져 공산면과 해안면에서 전쟁의 위협이 가해졌다. 또 6·25전쟁 발발 직후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의 불로동·지묘동·만촌동·효목동과 대구광역시 수성구 고모동[옛날 대구광역시 동구 고모동] 등지에서 민간인학살이 자행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 발생한 6·25전쟁은 팔공산을 배경으로 치열하게 벌어졌으나 전쟁의 직접적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쟁에서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의 지리적 전략적 가치가 확인되었다. 또한 전쟁을 경험하면서 평화의 가치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