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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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八公山左翼武裝遊擊隊活動鎭壓 |
영어공식명칭 | Left-Wing Armed Guerrilla Unit Activity and Suppression of Palgongsan Mountai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40년대 후반부터1950년대 중반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전개된 좌익 무장 유격대 활동과 진압
[개설]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는 6·25전쟁 이전에 초기적 형태의 좌익 무장 유격대인 야산대 활동이 전개되었다. 1949년 6월 조선노동당의 창당 직후인 동년 7월 남한 내 유격대를 지도하기 위해 조선인민유격대의 제3병단이 활동하였다. 6·25전쟁 시기에는 조선노동당 경북도당이 제3지대로 편성되었다가 동해남부당을 통합해 제4지구당으로 개편하고, 제4지구당 내 유격 활동을 위한 제3지대를 새롭게 편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팔공산의 좌익 무장 유격대는 위로는 강원도, 아래로는 부산까지를 활동 범위로 삼았다.
[역사적 배경]
해방 후 대구시와 전국에서 좌익이 수세에 몰리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좌익의 무장 유격 활동이 발생하였다. 대구시에서 시작된 1946년 10월항쟁 이후 미군정의 좌익 세력 검거 등으로 활동이 제한된 좌익세력, 1948년 6연대 사건을 일으킨 좌익 성향 군인 등이 자생적으로 팔공산을 배경으로 무장 유격 활동을 벌였다. 또한 육이오전쟁 이전 북한은 ‘결정적 시기’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무장 유격대를 남파시켜 남한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1946년 7월 조선인민유격대의 창설하여 남한 유격지대를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6·25전쟁이 발발하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정규군이 유격대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팔공산에서 좌익 무장 유격대 활동이 전개되었다.
[경과]
1950년 7월 27일 남로당 경북도당위원장 배철이 지도하는 7명으로 구성된 유격대가 동촌비행장을 이틀간 점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박종근이 지도하는 제3지대는 남한강 방면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매복기습전 3회, 군경과 맞닥뜨린 전투 3회 등 여섯 번의 전투를 치러 군경 105명을 살상하고 포로 6명을 붙잡았다고 북한에 보고하였다. 제4지대 남도부부대는 팔공산을 비롯한 덕유산·운문산·신불산·일월산 등지를 거점으로 하여 경상도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였는데, 육군 특무부대는 제4지대 남도부부대가 부산 조병창과 미군 동병부대 등 중요시설의 방화 파괴하였다고 파악하였다. 또한 경찰관의 교전 횟수 무려 7백여 회에 군경 사살 1천 8백여 명, 각종 무기 약탈 8백여 정, 각종 실탄 2만여 발, 민가 방화 1백여 호, 민가 습격 5백여 호, 군용열차 전복 20여 량, 군용트럭 소각 또는 파괴 2백여 대에 달하는 전투 결과를 낸 것으로 파악하였다.
[결과]
팔공산의 좌익 무장 유격대 활동은 제4지구당의 남도부 부대의 지도부가 육군 특무부대에 의해 검거되고, 팔공산 아지트가 진압되면서 주력이 붕괴되었다. 1953년 10월 무렵부터 제4지구당이 대구에 비밀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육군 특무부대에서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육군 특무부대 부대장 김창룡의 직접 지휘 아래 검거 작전이 진행되었다. 1954년 1월 16일 제3지대 부지대장 또는 팔공산 부대장 유응재가 대구시내 노상에서 체포되었다. 1854년 1월 19일에는 남도부의 부관 홍만식도 체포되었다. 1954년 1월 20일 육군 특무부대는 특별수사대를 편성해 팔공산의 제4지구당 아지트를 급습해 팔로군 출신 군의장 지춘란을 생포하고, 무기와 문서 등을 압수하였다. 1954년 1월 21일 남도부가 동인동의 한 주택에서 체포되었다. 이로써 제4지구당의 주력이 붕괴되었다. 남도부는 장택상 등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1955년 사형 집행되었다.
[의의와 평가]
팔공산은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 좌익의 무장 유격대 활동의 주요 근거지로 활용되었다. 이에 팔공산은 좌우 이데올로기가 무력적으로 충돌하는 주요 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