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3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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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지석묘(支石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이세호 |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매장 시설.
[개설]
고인돌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중 하나로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한다. 고인돌은 큰 돌을 이용하여 상자 모양의 무덤방을 만든 후 그 위에 큰 돌을 덮어 놓은 형태를 말하며, 큰 돌을 괴고 있다는 뜻의 괸돌에서 유래되었다.
고인돌은 전 세계적으로 약 6만여 기가 분포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남한과 북한을 모두 합쳐 약 3만 기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제주도를 포함한 전역에 걸쳐 분포해 있다. 특히 서북한 지역을 비롯한 충청도·전라도 지역의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 상당수의 고인돌이 보고되어 고인돌 문화가 서해를 통한 바다와 연관성을 가지면서 전파·발전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인돌이 분포한 곳의 지세를 살펴보면 하천가의 평지나 구릉, 고갯마루와 산기슭 등 인간 생활과 밀접한 곳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무거운 돌을 운반해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 바위를 구하기 쉬운 곳에 위치한 특징을 보인다. 특히 하천가에 인접한 평야 지역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지형을 가진 곳에는 많은 수의 고인돌이 밀집된 경우가 많다. 이는 당시의 사회가 농경을 중심으로 생활한 데에 기인하며 농경지 확보가 용이한 곳에 그들의 주거 영역 및 묘를 조성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고인돌의 분류는 종래에는 한강을 기점으로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구분하였다. 하지만 한강 이남·이북할 것 없이 다양한 형식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아 무의미해졌으며, 현재는 탁자식, 기반식 그리고 개석식의 3가지 유형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탁자식 고인돌은 판판한 4개의 받침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형식이다. 무덤방의 모양은 ‘ㅍ’자 또는 ‘ㅁ’자의 형태를 갖추는 것이 많으며, 무덤방이 땅 위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관계로 받침돌이 원형을 유지하는 경우가 드물다. 탁자식 고인돌은 한강을 기준으로 할 때, 이북 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여서 북방식이라고도 한다.
기반식 고인돌은 땅 위에 놓인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바치고 있는 것으로 무덤방을 땅 속에 마련하였다. 주로 호남과 영남 등 남부 지방에 분포한 특징으로 보이며, 아직 북한 지역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어 남방식으로 부르기도 한다.
개석식 고인돌은 땅 위에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는 것으로, 덮개돌과 무덤방 사이에 받침돌을 두지 않아 무지석식으로도 불린다. 개석식 고인돌은 요동 반도를 비롯한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분포해 있으며, 가장 많은 수가 발견되었다.
[현황]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경우 학익동에 7~8기, 주안동에 2기, 문학동에 1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어 있으나, 현재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학익동 고인돌 2기, 주안동 고인돌 1기, 문학동 고인돌 1기뿐이다. 1953년에 발행된 『한국사전 유적 유물 지명 표(韓國史前遺蹟遺物地名表)』에 의하면 인천광역시 연구수 청학동에 고인돌 1기가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확인할 수는 없다.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남아 있는 고인돌들은 북방식이거나 혹은 북방식으로 추정되며, 과거 자료를 통해 볼 때, 학익동 고인돌에 속해 있는 고인돌들은 적어도 북방식이 우세하였던 것으로 추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