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양민학살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465
한자 達城郡 良民虐殺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연표보기 - 달성군 양민학살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50년 9월연표보기 - 달성군 양민학살사건 종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 6월 3일 - 경상북도청 사회과에서 양민 학살자 명단 신고 접수 개시
성격 양민학살사건

[정의]

한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발생한 양민 학살 사건.

[역사적 배경]

한국 전쟁 중 남한 지역에서 진행된 양민 학살은 국군 및 미군, 인민군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남한에 의한 양민 학살은 인민군이 점령하였던 지역, 빨치산 근거지 일대, 전쟁 직후 비점령 지역 등에서 최소한의 법적인 심리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1949년 6월 5일 결성된 국민 보도 연맹의 경우, 가입 인원이 10만 명 혹은 30만 명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희생을 당하였다. 이것은 한국 전쟁 전후 최초의 집단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다.

[경과]

달성군의 양민 학살은 경상북도 지역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컸다. 대구와 달성에서는 한국 전쟁 직후인 1950년 6월부터 9월 사이에 학살이 집중되었다. 대구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 2,000~3,000명과 각지에서 예비 검속된 국민 보도 연맹 관련자 5,000여 명 등 8,000여 명이 가창골, 경산 코발트 광산 등지에서 학살되었다. 이 가운데 가창골의 학살은 한국 전쟁 발발 일주일 뒤인 6월 말에서 7월 초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피해자들은 대부분 대구 형무소에 수감된 미결수와 기결수들이었다. 특경대에 의해 저질러진 가창골 양민 학살은 대구 형무소 수감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기에 대량 학살이었다. 또한 한국 전쟁 중 가창에 무장 반공 단체 호림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가창 주민에 대한 학살도 피해를 가중시켰다.

달성군에서 벌어진 양민 학살은 4·19 혁명을 계기로 학살 배경, 학살 현장과 규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양민 학살을 조사하기 위한 국회 특별 조사반은 가창댐 부근, 파동, 상원동, 달성 광산 등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또 같은 시기에 결성된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가 발굴한 학살 현장은 상인동, 송현동, 만촌동, 고모동 등지였다. 이들 현장은 학살 당시는 달성군이었으나 1960년 현재 대구시로 행정 구역이 변경된 곳이었다.

[결과]

1960년 6월 3일부터 국회 조사반의 지시로 경상북도청 사회과에서 유족의 신고를 접수받았는데 4,000여 건이 신고 접수되었다. 그러나 달성군에서 희생당한 학살자의 신분과 규모를 알 수 있는 명부가 전혀 없거니와 현장 조사 자체가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왔기에 진상 규명에 어려움이 있다.

[의의와 평가]

달성군 양민학살사건은 전국적인 그것과 마찬가지로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구조화된 극단적 이념 대립에 따른 희생이었다. 향후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진상 규명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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