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자취, 동구에 지명으로 살아있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1456
영어공식명칭 Trace of Wanggeon, He is alive to a Place Name in Dong-gu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석배

[정의]

고려시대 태조 왕건으로 인해 생겨난 대구광역시 동구 지명들과 문학작품.

[개설]

927년(태조 9) 팔공산 일대에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군대와 후백제 견훤(甄萱)의 군대는 큰 전투를 벌였다. 바로 공산전투이다. 고려군은 김락(金樂)신숭겸(申崇謙) 장군을 비롯하여 수많은 군사가 죽고, 왕건은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났다. 대구광역시 동구 일대와 신숭겸 장군이 전사한 지묘동 일대에는 공산전투와 유래한 지명들이 전하고 있다.

[왕건, 신라를 구원하러 친히 출전하다]

후삼국시대 때, 고려의 태조와 후백제의 견훤은 화친을 맺어 양국 간에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듯했지만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 관계는 여전하였다. 양국의 대결은 불가피하였는데, 견훤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표면상 유지되던 양국 간의 평화는 깨어지고 공산에서 국운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927년 9월에 견훤군이 근품성(近品城)[지금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을 공격하여 불사르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지금 경상북도 영천시]를 습격하고 경주 가까이 이르렀다. 신라 경애왕이 연식(連式)을 보내어 태조 왕건에게 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다. 왕건은 시중 공훤(公萱) 등에게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다. 이들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이 신라 서울로 쳐들어갔다. 그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다가 적병이 왔다는 말을 듣고 성 남쪽의 별궁으로 달아났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서 마음대로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였다. 신하들을 시켜 경애왕을 붙잡아 핍박하여 자결하게 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경애왕의 표제(表弟)인 김부(金傅)를 왕[경순왕]으로 세우고, 왕의 아우 김효렴(金孝廉)과 재상 영경(英景) 등을 포로로 잡고, 자녀들과 각종 장인들과 무기와 보물을 모조리 빼앗아 가지고 돌아갔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친히 정예 기병(騎兵)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왕건군은 927년 늦가을[또는 초겨울]에 개성을 출발하여 계립령(鷄立嶺)을 넘어 문경, 상주, 선산을 거쳐 공산지역을 지나 영천 방면으로 진군하다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견훤군과 맞닥뜨리게 된다. 왕건군이 지금 대구광역시 북구 무태동을 지날 때, 왕건이 이곳부터는 견훤군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니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태만함이 없도록 하라고 한 데서 뒷날 ‘무태(無怠)’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왕건이 이곳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태만한 사람들이 없다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왕건이 무태를 지나 연경동 동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선비들이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감탄하였다고 해서 뒷날 ‘연경(硏經)’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왕건과 견훤, 팔공산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혈전(血戰)을 벌이다.]

왕건군은 견훤군을 격파하기 위해 동화천을 따라 동쪽으로 진군하여 지묘동미대동을 거쳐 능성고개를 넘어 영천 방면으로 진군하였다. 왕건군은 영천 서쪽 30리쯤 되는 곳에서 견훤군과 싸우다가 패퇴하였다. 이때 왕건이 퇴병하면서 공산 밑에 조그마한 봉우리를 보존하고 있었다고 그 곳을 태조지(太祖旨)라고 했다고 한다.

왕건의 군대가 대패하고 후퇴할 때 견훤의 군대가 진군의 나팔을 불었고, 이곳으로 퇴각하던 왕건의 군사가 이 소리를 듣고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고 해서 ‘나팔고개’라고 했다고 한다. 동화천 방향으로 약간 완만하게 이어지는 언덕으로 현재 지묘동 팔공보성타운 앞에 위치한 곳이다. 일설에는 왕건이 진군을 계속하면서 이 고개에서 적진을 향해 진군의 나팔을 불었다고 해서 나팔고개라고 했다고 하고, 왕건의 군사를 깨뜨린 견훤의 군사가 이 고개를 넘으면서 나팔을 불렀다고 해서 나팔고개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한편 공산댐 근처의 고개를 나팔고개로 보기도 한다.

전열을 재정비한 왕건군은 견훤군과 작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던지 양쪽 군사들이 쏜 화살이 하천을 가득히 메웠다고 한다. 그래서 뒷날 이 하천을 살내[전탄[箭灘]]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의 서변동과 동변동 사이에 흐르고 있는 동화천의 하류로 금호강과 합류하는 곳이다.

마침내 왕건군과 견훤군은 지묘동 일대에서 나라의 운명을 걸고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왕건군은 견훤군에게 참패하여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이때 고려의 충신 신숭겸왕건을 살리기 위해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신숭겸은 견훤군의 눈에 잘 드러나는 왕건의 전복(戰服)으로 바꿔 입고 왕건으로 가장하여 김락 장군과 더불어 진두지휘하며 결사적으로 싸웠다. 왕건은 평복으로 갈아입고 신숭겸이 적진을 교란하는 동안 북쪽에 있는 산으로 도망가서 사지에서 탈출하였다. 신숭겸김락은 자신이 섬기던 임금을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고, 견훤의 군사들은 신숭겸왕건으로 생각하고 그의 머리를 베어 갔는데 지금도 그 머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신숭겸의 시신을 거두려고 와 보니 머리도 없고 옷도 벗겨져 분별하기 어려웠다. 유금필 장군이 신숭겸의 왼발 아래 칠성(七星)이 있으니 그것을 보면 찾을 것이라고 하여 지금의 봉분 자리에서 시신을 찾아 지금의 강원도 춘성군 서면 방독리에 묘소를 세우고 장례를 지냈다. 왕건지묘동에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장렬히 전사한 신숭겸 등을 추모하기 위해 지묘사(智妙寺), 미리사(美理寺)를 세워 김락신숭겸의 충절을 기렸다. 뒷날, 지금의 지묘1동 뒷산을 왕을 살렸다는 뜻에서 ‘왕산(王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공산동 파군재삼거리에 위치한 고개 일대에서 견훤군이 왕건군을 크게 무찔렀다고 해서 이곳을 ‘파군재(破軍峙)’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견훤의 군대가 왕건의 군대를 이기고 진을 거두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한편 신숭겸 등이 공산전투에서 패했을 때 지혜와 묘책으로 왕건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지묘(智妙)’라고 했다고 한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두 공신인 신숭겸김락의 거룩한 충절을 기리기 위해 팔관회에 가상희(假像戱)를 하도록 했다.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했더니, 그들은 술을 받아 마시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도 추었다고 한다.

예종은 1120년(예종 15)에 서경에 순행하여 팔관회를 열었다. 이때 김락신숭겸의 허수아비가 비녀를 꽂고 자주색 옷을 입고서 말을 타고 뜰을 뛰어다녔다고 한다. 예종은 기이하게 여겨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왕을 대신해서 죽은 공신인 김락신숭겸이라고 했다. 예종은 송도에 돌아와 한시 「도이장시(悼二將詩)」와 향가체의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두 공신을 추모하였다.

「도이장시」

견이공신상(見二公臣像)[두 공신의 모습을 보니]/환란유소사(汍灡有所思)[생각에 잠겨 눈물 흐르네.]

공산종적막(公山蹤寂寞)[공산의 옛 자취는 쓸쓸한데]/평양사유유(平壤事留遺)[평양에는 그 일이 남아 있다네.]

충의명천고(忠義明千古)[충의는 천고에 밝게 빛나고]/사생유일시(死生惟一時)[생사는 오직 한 때의 일이라네.]

위군제백인(爲君躋白刃)[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종차보왕기(從此保王基)[이로부터 나라의 기틀 보전되었네.]

「도이장가」[김완진 해독]

주을완호백호심문(主乙完乎白乎心聞)[니믈 오ᄋᆞᆯ오ᄉᆞᆯᄫᅳᆫ ᄆᆞᅀᆞᄆᆞᆫ]/

제천을급곤(際天乙及昆)[ᄀᆞᇫ하ᄂᆞᆯ 밋곤]/

혼시거사의(魂是去賜矣)[넉시 가샤ᄃᆡ]/

중삼오사교(中三烏賜敎)[몸 셰오신 말ᄊᆞᆷ]/

직마우욕망미아리자급피(職麻又欲望彌阿里刺及彼)[셕 맛도려 활 자바리 가ᄉᆡ와뎌]

가이공신량(可二功臣良)[됴타 두 功臣아]/

구내직은(久乃直隱)[오래옷 고ᄃᆞᆫ]/

적오은현호사정(跡烏隱現乎賜丁)[자최ᄂᆞᆫ 나토신뎌]

「도이장가」[김완진 해석]

님을 온전케 하온 /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 넋이 가셨으되 / 몸 세우시고 하신 말씀 / 직분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좋다, 두 공신이여. / 오래 오래 곧은 / 자최는 나타내신저.

[왕건, 사선(死線)을 뚫고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목숨을 건지다.]

왕건왕산으로 달아났다가 염불암 옆의 바위에 잠깐 쉬었는데 그 바위를 ‘일인석(一人石)’이라고 한다. 왕건은 다시 불로천의 상류인 지금의 시량이로 도주하였다. 이곳에도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여러 곳에 전해오고 있다. 지금의 지묘동 동남쪽에 위치한 봉무동(鳳舞洞)에는 왕건이 도주하다가 앉아서 쉬었다는 ‘독좌암(獨坐巖)’(‘독지바위’라고도 함)이 있다. 그리고 왕건이 지금의 해안교 다리가 있는 부근 들판을 지날 때 혹 견훤군이 나타날까 걱정하였으나 무사하게 되자 마음이 놓여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고 해서 이곳을 ‘해안(解顔)’이라고 했다. 왕건이 지금의 불로동 쪽으로 지나다 보니 노인과 부녀자는 피난을 가고 어린아이들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뒷날 이곳을 ‘불로동(不老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왕건은 넓은 들판을 피해 지금의 평광동 뒷산으로 도주하다가 나무꾼을 만나 주먹밥을 얻어먹고 산을 넘어 매여동 쪽으로 향했다. 나무꾼이 나무를 다하고 내려와 보니 그 사람이 사라지고 없었다. 뒤에 마을 사람들이 그가 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곳을 왕을 잃은 곳이란 뜻으로 ‘실왕리(失王里)’라고 했는데, 점차 음이 변해 ‘시량이’ 또는 ‘시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 신숭겸의 영정을 모시던 대비사(大悲寺)를 세웠다고 한다.

왕건이 지금의 검사동을 지나다가 금호강변의 모래가 비단처럼 곱다고 하여 ‘금사(金沙)’로 부르게 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지명에 비단 금 자가 너무 아름답다고 하여 모래를 일일이 검사해야 한다고 검사할 검 자로 바꾸어 ‘검사(檢沙)’가 되었다고 한다. 왕건은 지금의 안심에 이르러서 견훤군의 추격에서 벗어난 것으로 믿고 안심하였다고 해서 ‘안심(安心)’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 왕건안심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오자 한층 여유가 생겨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마침 반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고 해서 이곳이 ‘반야월(半夜月)’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달리는 왕건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 반달이 떠서 도주로를 비춰주었다고 해서 반야월로 부른다고도 한다.

한편 왕건군과 견훤군이 한창 전투를 벌일 때 왕건의 부하 장수들이 말총으로 큰 돌을 굴려서 입석동까지 왔는데, 그 뒤에 바위를 그대로 두고 떠나버려서 ‘입석(立石)’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왕건, 사지(死地)를 벗어나 앞산에 피신하다.]

왕건은 견훤군의 추격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 금호강을 건너 앞산으로 도주하여 앞산[비슬산[琵瑟山], 또는 대덕산[大德山]] 중턱에 위치한 은적사 부근의 자연 동굴에 한동안 숨어 지냈다. 왕건이 자취를 감춘 굴이라고 해서 ‘은적굴(隱跡窟)’이라고 하였으며, 936년(고려 태조 18)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은적사(隱跡寺)’를 지었다.

얼마 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왕건은 보다 안정된 장소인 앞산 안지랑골의 안일사로 거처를 옮겨 얼마 동안 지냈다. 왕건이 이용했던 약수터를 왕이 마시던 우물이라고 해서 ‘왕정(王井)’이라고 불렀으며, 그 물을 ‘장군수(將軍水)’라고 했다.

견훤왕건이 안일사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들이닥치자 왕건은 급히 안지랑골 정상 부근에 위치한 동굴로 피신하였다. 지금도 절 위 500m 지점에는 왕건이 머물렀다는 굴이 있는데, 왕이 피신했던 굴이라고 해서 ‘왕굴(王窟)’이라고 했다. 안일사는 927년(경순왕 1)에 영조(靈照)가 창건하였으며, 왕건이 편안히 쉬어간 곳이라고 해서 ‘안일사(安逸寺)’라고 하였다. 한편 ‘안지랑골’이란 지명은 ‘왕지렁이’라는 별명을 가진 견훤왕건을 잡으러 온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왕건은 동굴에 잠깐 머무르다가 이곳도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앞산을 넘어 반대편에 있는 임휴사 근처로 숨어들었다. 이 절은 신라 경명왕 5년(921년)에 영조(靈照)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사찰인데, 왕건이 이곳에 임(臨)하여 쉬어간 곳이라 하여 ‘임휴사(臨休寺)’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임휴사 부근에서 며칠을 쉰 왕건은 성주, 김천을 거쳐 개성으로 무사히 돌아가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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