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0455
한자 仁嶽堂義沾大師碑
영어공식명칭 Stele for the Great Monk Uicheom at Inakdang Hall
이칭/별칭 화엄강주 인악대사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08년연표보기 - 인악당 의첨대사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746년 - 인악당 의첨대사비 의첨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796년 - 인악당 의첨대사비 의첨 사망
현 소재지 인악당 의첨대사비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지도보기
성격 기념비
관련 인물 인악당 의첨대사|김희순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비신[높이 154㎝, 폭62㎝, 두께 21㎝]|비개[가로 144㎝, 세로 105㎝, 높이 68㎝]|비부[가로 170㎝, 세로 216㎝, 높이 75㎝]
소유자 동화사
관리자 동화사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동화사에 있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탑비.

[개설]

인악당 의첨대사[1746~1796]의 본관은 성산, 자는 자의(字宜), 호는 인악(仁岳), 이름은 의첨(義沾)이다. 1746년 달성 인흥촌에서 출생하였다. 인악대사는 당대 고승인 유일(有一)과 쌍벽을 이루었다. 유일은 호남지방에서, 인악대사는 영남지방에서 이름을 떨쳤다.

[건립 경위]

의첨대사를 기리기 위해 1808년 동화사 경내에 인악당 의첨대사비를 세웠고 경상도관찰사 김희순이 글을 썼다.

[위치]

인악당 의첨대사비는 동화사 경내 금당선원 가는 길에 당간지주 오른쪽 ‘인악당(仁岳堂)’이란 편액이 걸린 비각 안에 있다.

[형태]

인악당 편액이 걸린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형식이다. 비부[비석 받침대]는 봉황새 모양이고 비문은 행서체로 음각하였다. 동화사는 그 터가 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이라 전하고 창건할 때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여 사찰 이름을 동화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깃든다고 전해지는데 경내에 봉황문, 봉서루가 있고 인악당 의첨대사비 받침도 거북이 모양이 아닌 봉황새 모양이다.

[금석문]

[해석]

종지를 도와 교리를 수립한 화엄강주 인악대사 비명과 서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유교가 이미 쇠퇴하고 불법 또한 시들하니 둔갑으로 도통한 선사와 명리를 탐하는 승려가 부처님을 팔아 옮겨가며 이득을 남기고 업을 미혹하는데 이골이 나서 육진과 육근을 망령되게 하여 이 기본적인 영광을 매몰시키니 만약 반야의 자비로운 배에 흔쾌히 올라서 부처님의 해명을 잇는 자가 아니라면 누가 능히 사람들을 위하여 속박을 풀어 곧바로 자성을 명료하게 밝히겠는가? 해동에 큰 선사가 계시니 인악이라. 속성은 이씨요, 법명은 의첨이시다. 고려조의 사공으로 성산부원군이신 능일의 23세손이다. 아버지는 휘징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이다. 1746년(영조22) 9월 9일에 달성의 인흥마을에서 대사를 낳으셨는데 이날 새벽 방안에는 빛이 있었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보통 아이와는 달랐다. 조금 성장하매 유가 경전에 능통하였다. 외우고 쓰는데 뛰어나니 글을 읽으매 세 번을 넘지 않았으며 그 후에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일찍이 용연사의 산방에서 공부할 때 불가의 청정법을 보고는 마음에서 감응이 일어나 마침내 가선헌에서 머리를 깎고 벽봉선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인하여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구하러 남쪽 여러 고을로 순력한 고사의 선례를 좇아 서악, 추파, 농암 등 여러 명사들께 두루 참구하였다. 이로부터 빗장이 열리듯 도를 깨달아 회현기를 편집하니 교종이 융성하게 되었다. 1768년[무자년]에 벽봉으로부터 두 번째 계를 받고 설법단에 오른 때가 23세 나이였다. 1770년[경인년]에 설파로부터 세 번째 계를 받고 드디어 선의를 전하니 임제, 서산, 상봉의 원손이 되었다. 스승의 인가를 받아 후세의 모범이 되었으니 진실로 이른바 화엄법계 가운데의 분신으로 접종하여 원력의 법륜에 오르게 된 자가 아니겠는가? 이때 영호남 여러 산문에서 교화를 행하였으나 법당을 열고 불자를 세워서 지혜의 칼을 굳게 지킨 것으로 말하자면 팔공산이 곧 귀착지이다. 이에 별안간 이견을 내어 나아갈 길이 없는 자로 하여금 모두 애오라지 한 줄기 길을 통하게 해 주었으니 좋은 말이 채찍을 맞고서 바람을 좇는 듯한 자들이 많았다. 아! 대사는 훤칠한 칠 척의 장구로서 불법의 성이 무너져가는 때를 당하여 동남지방에서 불도를 창도하여 자비심으로 널리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그가 불문에 남긴 공이 역시 많다. 1770년[경술년] 수원의 용주사에서 증명사가 되었는데 불장복문을 지어 임금의 칭찬을 받았으니 이 또한 불가의 훌륭한 일이다. 1796년[병진년] 5월 보름에 병이 들어 비슬산 명적암에서 입적하시니 세수 51세이며 법랍 34세이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은 크게 탄식하며 인악대사께서 돌아가셨다라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때 더위가 한창이었음에도 육신에 사흘 동안 향기가 있었으니 어찌 특이하지 않은 일인가? 여러 제자들이 서로 더불어 서북 방향 산기슭에서 다비를 행하였다. 용연사의 삭발한 곳에 영당을 건립하였고 또 동화사에서 설법한 곳에 진영을 모셨다. 두 사찰은 달구벌의 남쪽과 북쪽에 있다. 나는 유가의 사람이다. 대개 성인의 시대가 멀고 성인의 말씀이 인멸되매 이단이 무리지어 일어나는데 불법도 그중에 하나이다. 그 처음 가르칠 때는 마음에 곧 본성을 나타내는 방편으로 사람을 구원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법문을 위하는 마음이 쇠퇴하면 사악한 스승과 요망한 제자가 광란을 부채질하고 거짓을 부추겨 도를 그르치고 중생을 미혹되게 할 따름이다. 대사께서 훌륭한 계율을 지켜 미혹되고 어리석은 사람을 깨우쳐 주니 또한 가히 어두운 동굴에 번갯불이요 사나운 물결에 성스러운 약물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대사의 벗인 관월과 영남에서 서로 만나서 대사의 행적을 매우 상세히 들었는데 이제 또 그 문도가 대사의 비명을 간절히 구하므로 마침내 번화함을 없애고 메마른 말로써 비문을 새기게 했으니 훗날 승속의 사부대중으로서 이 비를 읽는 자는 그 또한 깊은 뜻 정밀한 행실을 통해 마음을 인도하고 속념을 경계함이 있지 않겠는가? 명을 지어 이른다.

대 비구가 계시니 달성의 남쪽이로다./ 명성은 빛나고, 위의가 깊고 깊도다./ 증명사가 되시어 하늘 북소리를 내셨네./정법안장을 누가 감히 사모하지 않으리오./ 화엄누각은 본디 본말이 있다네./ 몸소 교화를 보이시니 뭇 오묘함이 여기에 있네./ 조사의 등불 다시 타오르고 부처님의 빛 거듭 새롭네./ 몸은 구름처럼, 마음은 달처럼 길이 금륜을 보호하네./ 저 우뚝한 용연사에 그 영정이 엄숙하네./ 말법시대를 슬퍼하며 우리들은 이 명을 새기네.//

1808년[숭정 세 번째 무진년] 3월 일에 세우다. 김희순이 짓고 전액하고 비문을 쓰다.

[원문]

扶宗樹敎 華嚴講主 仁嶽大師 碑銘幷序

如是我聞 儒敎旣衰 佛法亦微 狐禪羊僧 稗販塼易 惑業襲習 妄爲六塵六根 埋沒此一段靈光 若非快豋般若慈舟 續佛慧命者 疇能爲人 解粘去縛 置下明了自性也 海東有大禪師曰 仁嶽 俗姓李氏 法名義沾 麗朝司空 星山府院君 能一 二十三世孫也 父徽澄 母達城徐氏 英廟丙寅九月九日 誕師于達州之仁興村 是晨室中有光 幼而聰慧異凡兒 稍長能通外典 長於記誦 讀無過三遍 其後不忘 嘗讀書龍淵之山房 見佛家淸淨法 心生感念 遂薙染于嘉善軒 受戒具於碧峰師而因遵善財南詢故事 歷參西岳秋波聾巖諸名師 自是輯會玄記 開鍵啓鑰 蔚爲敎宗 再期于碧峰受信具 登壇時 年才弱冠加三 庚寅三期于雪坡 遂傳禪衣 得爲臨濟西山霜峰之元孫 承師唯諾 爲後模型 眞所謂華嚴法界中 分身接踵 乘願輪而至者非耶 爾時行化於嶺湖諸山 而若夫開堂竪拂 堅持智刃則 八公山乃其歸止也 於是瞥生異見 進步無門者 皆使之聊通一線 良馬見鞭而追風者 衆矣 嗚呼 師以頎然七尺之軀 當法城頹倒之日 唱道東南 以慈悲普濟爲己任 其有功於佛門 亦多矣 庚戌抵隋城之龍珠寺爲證師 賦佛藏腹文 得被宸賞 是又佛家之勝事也 丙辰端陽之月望示疾 入滅於苞山之明寂菴 世壽五十一 法夏三十四 聞者莫不太息曰 嶽師逝矣 時方暑肉身有三日香 豈不異哉 羣弟子相與茶毗於負坎之麓 就龍淵落紺之地而建影堂 又留一像於桐華說法之所 二寺在達邱之南北也 余儒名者 盖自聖遠言湮 異端朋興 佛法 亦其一也 其始敎也 未嘗不 以卽心見性 方便救人爲法門而其衰也 邪師魔弟 扇狂鼓譌 左道惑衆而已 則師之持守善戒 牖通迷蒙 亦可謂墨穴之電光 狂水之聖藥也已 余與師之友冠月 相遇嶺外 聞師之行甚詳 今又因其徒求師之銘甚勤 遂刊華除蔓, 廋詞 而俾刻之 後之緇白四衆 讀此碑者 其亦有深意密行 鉥心而砭俗者乎

銘曰 有大比邱 在達之南 聲光熊熊 法幢深深 作證明師 發音天鼓正法眼藏 孰敢不慕 華嚴樓閣 自有源委 以身示化 衆玅在玆 祖燈再熖 佛日重新 身雲心月 長護金輪 兀彼龍刹 有儼其幀 悲憫末法 我勒斯銘

崇禎紀元後三 戊辰 三月 日 立 金羲淳 撰 幷篆書

[의의와 평가]

인악당 의첨대사비 귀부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거북이가 아니라 봉황 형상으로 제작한 점이 특징이다. 인악당 의첨대사비 귀부가 봉황의 형상인 이유는 동화사의 지세가 봉황이 알을 품은 형세[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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