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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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文煥 |
영어공식명칭 | Jang, Munhwa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김진호 |
출생 시기/일시 | 1887년 1월 30일 - 장문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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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장문환 예산 한내장 독립만세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47년 08월 31일 - 장문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장문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출생지 | 장문환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
거주|이주지 | 장문환 거주지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
활동지 | 한내장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대천시장 |
묘소 | 장문환 묘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상궁리 이장 |
[정의]
일제강점기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장문환(張文煥)[1887~1947]은 1919년 4월 3일 예산군 고덕면 한내장에서 거행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가계]
장문화의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1887년 1월 30일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예산 지역 3.1운동은 3월 3일 오후 11시 30분경 윤칠영(尹七榮) 등 여러 명이 예산읍내 동쪽 산 위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최초이다. 이후 몇 차례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일제의 사전 탐지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3월 13일 대흥공립보통학교 학생 300명이 대흥시장에 나아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31일에는 예산읍내에서 약 60명이 헌병 분대와 군청으로 이동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본격적인 3.1운동은 4월 3일부터 5일까지 3일 동안 예산 지역 각 면리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기간 동안의 가장 대표적이고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은 고덕면 한내장[대천시장]에서 전개된 3.1운동이다.
장문환은 상궁리 이장으로, 통장과 반장 등을 통해 면내 주민들에게 연락하여 4월 3일 한내장 장날에 모이도록 했다. 4월 3일 한내장에 모인 약 3,000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장 인근에 있던 헌병주재소에서 급거 출동한 헌병오장 시무라 마쓰다로[志村松太郞]와 헌병들은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나 만세 군중은 헌병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더욱 거세게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헌병들은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을 시도하였고 이 과정에서 상궁리 통장이던 인한수(印漢洙)가 순국하고 2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장문환은 이인성 등 15~16명을 이끌고 인한수의 시신을 운구하여 헌병주재소 사무실에 안치하고 주재소장인 시무라 마쓰다로 헌병오장에게 거세게 항의 하였다.
그러나 헌병들은 장문환 등을 주재소 밖으로 몰아내고 인한수의 시신마저 사무실 밖으로 내쳤다. 장문환이 시무라 마쓰다로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며 항거하고 군중들이 호응하자 위기감을 느낀 헌병들은 군중을 향해 발포하였다. 갑작스러운 헌병들의 무력 발포에 만세 군중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헌병들은 장문환 등 7명을 체포·구금하였다. 장문환은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모리우라[森浦熊藏] 검사의 공소 제기로 5월 2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7년 8월 31일 사망하였다.
[묘소]
장문환의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2년 대한민국 정부는 장문환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예산군 고덕면 대천시장에 한내장 4·3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이 건립되어 있고, 우측에 의사 장문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한내장4·3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에서 매년 4월 3일 기념식과 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