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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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正喜 |
영어공식명칭 | Kim Jwonghee |
이칭/별칭 | 원춘(元春),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수연 |
출생 시기/일시 | 1786년 - 김정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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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19년 - 김정희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30년 - 김정희 고금도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836년 - 김정희 병조참판·성균관대사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40년 - 김정희 제주도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844년 - 김정희 세한도 제작 |
활동 시기/일시 | 1851년 - 김정희 함경도 북청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856년 - 김정희 사망 |
출생지 | 김정희 고택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묘소|단소 | 김정희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사당|배향지 | 추사기념관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324-17 |
사당|배향지 | 추사적거지기념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1661-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 관직|경력 | 대사성|이조참판 |
[정의]
조선 후기 예산 출신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
[개설]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금석학·도서·시문·지리학·음운학 등 여러 방면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여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고 역사적 저술을 남기는 등 조선 후기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여 후대의 서예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가계]
김정희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등 100여 개가 넘는다. 증조할아버지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며, 할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김이주(金頤柱)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김노경(金魯敬), 어머니는 기계 유씨(杞溪俞氏)이다.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활동 사항]
김정희는 1786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해 암행어사를 거쳐 대사성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헌종이 즉위한 후 다양한 일에 연루되어 제주도, 함경도 북청 등에서 1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마지막 유배는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된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으나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예와 학문에 몰두하다가 사망하였다.
김정희는 박제가 아래에서 배우고 청나라 연경에서 당대의 거유들과 교유하면서 경학과 고증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학문 연구의 중요한 목적은 실사구시이고 그것은 훈고(訓詁)로써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금석학은 물론이고 도서·시문·지리학·음운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특히 글씨에서는 특정한 서체에 구애되지 않고 역대 명필의 장점을 모아 추사체라고 불리는 독특한 서체를 개발해 예서와 행서의 새로운 경지를 창조하였다. 그림으로는 대나무와 산수를 잘 그렸다.
김정희는 단순한 학자나 예술가가 아니라 다양한 학문 분야를 섭렵하고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소화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선구자이며, 실증적인 실학의 학문 태도를 가장 잘 보여 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김정희의 뛰어난 학문은 청의 대유학자들이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학문과 저술]
김정희는 박제가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고증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이후 아버지를 수행하여 청나라 연경에 체류하며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여 금석 자료의 조사와 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였고,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과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는 등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연경에 가서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았고,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많은 서체를 익혔다. 이들 모든 서체를 밑바탕으로 추사체라고 불리는 독특한 서체를 개발해 예서와 행서의 새로운 경지를 창조하였다. 김정희의 작품으로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를 비롯하여 「모질도(耄耋圖)」, 「부작란(不作蘭)」 등이 특히 유명하다.
[묘소]
김정희의 묘소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김정희의 첫째 부인 한산 이씨의 묘 및 경기도 과천시에 있던 김정희와 둘째 부인 예안 이씨의 묘를 1937년 예산으로 이장하여 합장한 합장묘이다. 김정희 묘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예산군에서 유적을 관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예산에 있는 김정희 관련 유적으로는 김정희 선생 고택, 김정희 선생 필적 암각문, 예산 용궁리 백송 등이 있다. 김정희 선생 고택은 증조할아버지 김한신(金漢藎)[1720~1758]이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일대에 자리를 잡으면서 건립하였고 김정희가 태어난 집으로,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김정희 선생 필적 암각문은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오석산 중턱의 화암사(華巖寺) 뒤편 바위들에 새겨져 있는데, 시를 읊을 만한 좋은 경치란 뜻의 ‘시경(詩境)’, 석가모니를 뜻하는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작은 금강산이라는 뜻의 ‘소봉래 (小蓬來)’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산 용궁리 백송은 김정희가 24세 때인 1809년(순조 9) 10월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필통에 넣어 가지고 와서 고조할아버지인 김흥경의 묘 앞에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원래 밑에서부터 세 개의 가지로 자란 아름다운 형태였는데, 두 가지는 말라 죽고 현재는 한 가지만 남아 있다.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정희 관련 유물인 「혼서지(婚書紙)」·「생원시권(生員試券)」·「농상지실(農祥之室)」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