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항기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역사. 우리나라에서의 근대(近代)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학자에 따라서는 근대의 시점을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로 보기도 한다. 1. 대한제국기 현재의 영천 지역은 1894년(고종 31) 7월 갑오개혁으로 영천...
-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조직된 근우회 지회. 1926년 이래 국내·외에서 추진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의 결과, 1927년 2월 민족협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었다. 여성운동계에서도 1926년 말부터 여성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여 여성운동계의 통합 단일화를 위해 1927년 5월 27일 근우회가 창립되었다. 근우회의 창립 이념과 활동의 기본 방향은...
-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침략과 강점에 대항하여 영천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족 해방 운동. 영천 지역의 독립 운동은 1895년(고종 32) 을미의병(乙未義兵)에서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는데, 1895년 을미의병과 1906년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의병 투쟁, 1919년 3·1 독립운동, 1920년대 대중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1930년...
-
1592년(선조 25) 7월 14일 영천 지역 의병 연합진이 신녕현 박연(朴淵)에서 왜군을 물리친 전투. 박연 전투는 1592년(선조 25) 4월 22일 왜군에 의해 영천성이 함락된 후, 정세아(鄭世雅)·정대임(鄭大任)·권응수(權應銖) 등의 의병장이 연합하여 7월 14일 신녕현 박연에서 왜군을 물리친 전투이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의병과 관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고, 영...
-
경상북도 영천에 1921년 1월 사립으로 설립된 신교육 기관. 백학 학원은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안천리에 있는 백학서당[옛 백학서원의 후신]에서 1921년 1월 설립된 신학문 교육 기관으로 민족 교육을 통해 이육사(李陸史)[이원록(李源祿)]·조재만(曺再萬)[조용찬]·안병철(安柄喆)·이진영(李進榮)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민족 교육 기관이다....
-
1925년경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조재만(曺在萬)이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대구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출신의 조재만은 1922년 설립된 영천 백학학원(白鶴學院)에서 이원록(李源祿)을 만나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이원록은 1921년 영천군 화북면 오동리의 대지주 안용락(安庸洛)의 딸 안일양(安一陽)과 결혼하면서 백학학원에 다녔으며, 조...
-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에서 조직된 항일 의병 부대. 산남의진(山南義陣)은 중추원 의관 정환직(鄭煥直)이 광무황제로부터 의병 봉기의 밀지를 받고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영천을 중심으로 거병한 의병 부대이다. 초기에 정용기가 관군에게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1906년 9월 그의 석방을 계기로 의병진을 재편하여 영천·경주·청하·청송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산...
-
1919년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운동. 3·1 운동은 국내외의 정세에서 발생 배경을 찾을 수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 등으로 한반도를 비롯한 피압박 약소 민족의 해방을 고무시켰다. 뿐만 아니라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미국 윌슨(Wilson)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는 피억압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
-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1970년 4월부터 전개된 지역 사회 개발 운동. 새마을 운동은 1970년 4월 22일 전국 지방장관 회의에서 정해진 농촌의 자조 노력 진작 방안을 연구한다는 방침에 따라 5월 6일 정부 시책으로 시작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지역 주민의 자발적이며 자조적인 협동 노력에 의해 주민들 스스로가 생활 태도와 정신 자세를 혁신하고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
-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조직된 신간회 지회.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1927년 2월 15일 창립된 신간회는 1931년까지 존속하였다.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와 2~4만의 회원을 두고 있었다. 경상북도의 경우 1927년 6월부터 1929년 7월까지 신간회 김천지회를 시작으로 모두 21개의 지회가...
-
1919년 3월 6일부터 4월 8일까지 경상북도 영천군 신녕면 신녕공립보통학교의 교사 및 학생들이 전개한 만세 시위 운동. 신녕공립보통학교 만세 운동은 교사와 학생들이 야간에 전개한 만세 시위 운동이다.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되어 5월 중순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만주·하와이 등 국외에서도 계속되었다. 비폭력·일원화·대중화 등을 원칙으로 한...
-
1950년 9월 6일부터 9월 15일까지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국군 제6사단이 영천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저지시킨 방어 전투다. 이 전투는 대구 점령을 목표로 하던 북한군을 격퇴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 8월 초 북한군 중동부 전선 담당 제2군단은 공세의 주목표를 대구 점령으로 정하고, 4개...
-
1895년부터 1913년까지 경상북도 신녕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 당시 지방 제도 개정건이 공포되어 새로운 지방 행정 제도가 설치되면서 신녕현이 신녕군이 되었다. 신녕현의 옛 이름인 사정화(史丁火)는 지형이 배[舟]와 같고 한들[현 완전동(莞田洞)]에 3m 높이의 자연석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봉화제(烽火堤) 바람이 세차게 불면 갑령제...
-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선 시대 행정구역의 명칭. 신녕현(新寧縣)은 신라 시대 사정화현(史丁火縣)·화산(花山) 등으로 불리다가 757년(경덕왕 16) 군현재 한화개혁의 일환으로 지명을 고치면서 신녕현(新寧縣)이라 하였다. 바다의 풍파를 막아 평안하게 지나게 한다는 뜻으로 명명하였다 한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에 “신녕현(新寧縣)은 본시...
-
1943년 5월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박만선(朴晩善)이 영천의 신사(神社)에 방화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서울중동중학교 재학 중이던 박만선은 1942년 3월 일제가 시행한 강제 징병에 반대하는 지하선전 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장춘 주재원(長春駐在員)인 박동만(朴東萬)을 만나 밀명을 받고 입국했다. 1943년 5월 박만선은 명령 받은 대...
-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일어난 변천과 흥망 과정의 기록. 영천(永川)은 삼한 시대 부족 국가 골벌소국(骨伐小國)이 형성된 이후 절야화군(切也火郡)·임고군(臨皐郡)·영주(永州)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조에 들어와 1413년(태종 13) 작은 군현은 주(州)라는 명칭을 금지하고, 대신 천(川)과 산(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도록 하면서 영천이라 하였는데, 일제...
-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 후 장진홍(張鎭弘)이 제2차 계획으로 추진한 영천경찰서 폭탄 거사. 1927년 10월 18일 정오 경상북도 칠곡 출신의 장진홍이 대구의 일제기관 4개소를 폭파할 목적으로 배달시킨 점화식 폭탄 4개 중 3개가 폭발하여 경관 4명이 중경상을 입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파손되었다. 그 후 장진홍은 안동과 영천에서도 폭탄 거사를 추진...
-
1592년(선조 25) 7월 26일부터 7월 28일까지 영천 지역 의병들이 영천성을 탈환하기 위해 왜군과 싸운 전투. 영천복성 전투는 1592년(선조 25) 4월 22일 왜군에게 영천성이 점령당하자 영천 지역 의병이 중심이 되어 인근 의병들과 연합하여 성을 탈환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의병이 승리를 거둔 중요한 전투로 꼽히며, ‘영천복성 전투’ 또는 ‘영천성 복성 전...
-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전개된 소년 운동. 일제 강점기 때의 소년 운동은 1920년을 전후로 전개되었으며,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몰아내고 조국 광복을 목적으로 한 실력 양성 운동이다. 1919년 조직된 안변소년회와 왜관소년회는 동화나 학습을 목적으로 한 최초의 소년 운동 단체였으며, 1920년 조직된 진주소년회는 20세 이하의 학생들이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만세 운동을...
-
1919년 4월 12일 영천읍 장날에 전개된 만세 시위 운동. 영천장날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12일 영천읍 시장에서 농부 홍종현(洪鍾顯)이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여 군중을 선동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일어난 3·1 운동은 서울에서 시작되어 5월 중순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만주·하와이 등 국외에서도 계속되었다. 비폭력·일원화·대중화 등을 원칙으로 한...
-
1950년 9월 5일부터 9월 13일까지 경상북도 영천시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국군 제2군단 예하 제8사단 및 증원 부대들이 영천을 점령한 북한군 제15사단을 9일 간의 공방전 끝에 격퇴하고 영천을 탈환한 전투다. 이 전투를 계기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50년 북한군 제2군단은 8월 공세에서 구미~다부~대구 축선(軸線)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
-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결성된 청년운동 단체.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는 3·1 독립 운동 이후 영천 청년회(永川靑年會)·영천 기독 청년회(永川基督靑年會)·영천 기독 여자 청년회·영양 청년회(永陽靑年會)·영천 구락부(永川俱樂部)·금호 청년회(琴湖靑年會)·신녕 청년회(新寧靑年會) 등이 조직되었다.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되면서 사상계는 민족주의 계열과...
-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청년들의 사회운동.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대중의 힘을 효과적으로 결집하고 항일 역량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조직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에 따라 전국 각처에서 청년회가 조직되어 계몽적인 성격의 실력 양성 운동 및 문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영천 지역에서는 3·1 독립운동 이후 영천청년회(永川靑年會)·영천엡웟...
-
1895년부터 1913년까지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영천군(永川郡)은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 당시 지방 제도 개정건이 공포되어 새로운 지방 행정 제도가 설치되면서 영천군이 되었다. 고려 시대 영주(永州)로 불렸던 영천은 조선 개국 후 1413년(태종 13) 작은 군현은 ‘주’라는 명칭을 금지하고 대신 ‘천’과 ‘산’을 사용하도록 명하자 천을 선택...
-
일제 강점기인 1940년 경상북도 영천군 은해사에 설립된 불교학교. 오산 불교 학교(五山佛敎學校)는 1939년 10월 대한불교 조계종 경상북도 5본산이 영천 은해사 경내에 설립한 중등 정도의 불교학교이다. 1940년 4월 8일 개교 이래 근대 교육에 입각한 민족 계몽 운동을 실시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문화 말살 정책이 극에 달하여 젊은...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경상북도 영천시를 비롯한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 1948년 8월과 9월에 남북한 독립 정부 수립을 통해 한반도 분단은 공식화되었다. 북한은 대외적으로 중국 대륙 공산화, 주한 미군 철수, 애치슨(Acheson) 선언, 남한 내 남로당(南勞黨)의 실질적 붕괴, 정치·경제적 혼란, 국군의 국방력 열세 등 자신들의 유리한 배경을 이용하여 6월...
-
1895년 12월부터 1896년 1월 사이에 영천을 포함한 경상도 각 군현의 향교를 중심으로 돌았던 의병 문서. 「의병격문통문(義兵檄文通文)」은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각 의병진에서 창의 격문(檄文)이나 통유문(通諭文)을 각처로 보내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독려한 의병문서이다. 의병들이 봉기했을 당시 각지 향교를 중심으로 돌았던 의병 문서 다섯 건이 현재 경상북도 43개...
-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한말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무력 투쟁. 의병 항쟁(義兵抗爭)은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나라의 부름을 받기 전에 스스로 일어난 민군(民軍)의 무력 투쟁을 말한다.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은 민군이다. 나라가 위급하면 바로 의병이 일어나는데 조정이 명령하는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적개...
-
1642년(인조 20)부터 1643년 사이에 장현광 병·배향 문제를 놓고 벌어진 지산(芝山) 문인과 여헌(旅軒) 문인의 논쟁. 임고 서원 병배 논쟁은 영천 임고 서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병·배향을 둘러싸고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문인과 여헌 문인으로 나뉘어 전개한 논쟁으로 여헌학맥의 확산을 기하고 자신들의 학문적 입지를 보다 공고히 하고자 했던 여헌 문인과...
-
1592년에서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경상북도 영천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산포에 도착한 왜군은 경상도 지역 주요 고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영천성은 1592년 4월 22일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영천·신녕 지역의 의병들은 인근 지역의 의병들이 연합하여 각처에서 소규모의 유격전을 전개하여 승전하였다. 특...
-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전통 시대에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수리 시설. 제언(堤堰)은 농업용수를 저장하기 위해 설치한 제방(堤防)과 방축(防築)으로, 보통 ‘저수지’라고 한다. 16세기 이후 벼농사가 직파법(直播法)에서 이앙법(移秧法)으로 발전하면서 물의 확보가 농사에 중요한 문제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이앙법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전국에 많은 숫자의 제언이 설치된...
-
1392년부터 1863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된 시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역사. 조선 시대 영천군과 신녕현은 경상도 소속으로 별개의 지방 행정 단위로 존속하다가 일제 강점기 때 영천군으로 통합된 이래 현재 영천시 행정구역과 큰 변동 없이 이어지고 있다. 고려 시대 영주(永州)로 불렸던 영천은 조선 왕조 개국 후 1413년(태종 13) 작은 군현은 주(州)라는 명칭을 금지하고, 대...
-
조선 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 막부 장군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 사절단. 1428년(세종 10) 일본 막부 장군 습직(襲職) 축하로부터 시작된 조선통신사는 1811년(순조 11)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한 역지통신(易地通信)이 행해질 때까지 총 20회 이어진 외교 사절단이었다. 서울에서 목적지까지 5개월에서 8개월이 소요되는 조선통신사의 긴 노정은 단순히 정치·외교적 의미뿐 아...
-
1592년(선조 25) 5월 6일 신녕현 한천(漢川) 대동(大洞)[화남면 삼창 3리]에서 왜군을 소탕한 전투. 한천 전투는 영천성 복성 이전 여러 전투 중의 하나로 권응수 의병군이 신녕현 동편 한천 대동에서 지역민을 노략질하던 왜군 13명과 첩자 일당 30여 명을 소탕한 전투다. 비록 작은 전투이기는 하지만 임진왜란 초기 아군이 승리한 소중한 전투로 한천승첩 또는 한천전...
-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전개된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현재까지의 역사.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광복이라는 환희 속에 미국과 소련의 남북 분할 점령으로 인한 혼란과 좌우의 분열, 그리고 6·25 전쟁 등의 혼란기를 겪었다. 1960년 4·19 학생혁명과 1961년 5·16 군사정변, 그리고 197...
-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조직된 조선형평사의 영천형평분사에서 전개한 백정의 신분 해방 운동. 형평 운동은 일제 강점기인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조선형평사가 전개한 백정의 신분 해방 운동이다. 형평사 혹은 조선형평사는 1923년 5월부터 지·분사를 설립하기 시작하여 1923년 12월까지 전국적으로 80여 지·분사가 설립되었고, 1926년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