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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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時穆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시목(朴時穆)[1894~1945)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1919년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감찰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경상북도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로 돌아왔다.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 동경 지회(東京支會)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7년 5월 7일 일본 도쓰카(戶塚)에서 창립 대회를 개최한 신간회 동경 지회는 1920년대 동경 지역의 항일 운동에 관여하였으며, 사상 운동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 신간회 운동은 민족 통합 운동으로 출발하였지만, 1928년 이후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주도권 쟁탈전으로 혼란이 야기되면서 신간회 동경 지회에도 영향을 주어 주도권을 두고 양 계열은 대립하였다. 그는 민족주의 계열이 다시 주도권을 장악하던 과정에서 간사가 되어 항일 운동을 주도하였다. 1928년 2월 신간회 동경지회 임시대회에서 대의원에 선출된 그는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의 격문을 살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 후 1930년 대구 근교 팔공산(八公山)에서 광산 경영을 위장하여 박영덕·이상훈·심재윤·노석호·김인 등 애국지사를 규합하였으며, 청년 동지들을 중국 옌안[延安]으로 밀파하여 독립군(獨立軍)에 가담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3년에는 종교계와 협의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의 무력 항쟁 및 중국의 한국 광복군과 합세하여 대일 선전 포고(對日 宣戰 布告) 등을 계획하던 중 아들 박희규를 포함한 10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북경(北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아들과 함께 옥중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6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