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2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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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시흥,금주,금주현,소래읍,군자면,수암면,매소홀,장항구,소성현,장구군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현희 |
[‘시흥’ 하면 어디가 떠오르나요]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는 지리적으로 조선시대 인천부(仁川府)와 안산군(安山郡)에 속해 있었던 반면, 조선시대의 시흥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일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 ‘시흥’ 하면 떠오르는 곳이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이나 시흥행궁(始興行宮), 시흥사거리를 떠올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러다가 1914년 안산군에 속해 있던 군자면·수암면 지역이 시흥군에 편입되고, 1989년 시흥군의 소래읍·군자면·수암면이 시로 승격되면서 ‘시흥’이라는 행정명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2013년 시흥시 100년을 기념한 이유도 이에 근거한다.
이처럼 ‘시흥’이라는 지명은 이미 전통 시대부터 사용되었지만, 그 위치는 지금의 시흥시와 달랐다. 하지만 근대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인천과 안산에 속해 있던 소래읍·군자면·수암면이 시흥군에 편입되었고, 시흥군이 다시 여러 도시로 분리되면서 소래읍·군자면·수암면이 ‘시흥시’로 분리 승격되어 ‘시흥’이라는 지명을 잇게 되었다.
[조선시대 시흥 지명에 속해 있던 곳]
시흥이란 명칭은 고려 성종 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금주(衿州)의 이칭이다. 고려 말까지 금주현(衿州縣 또는 黔州縣)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1413년(태종 13) 행정구획 개편 때 금천현(衿川縣)으로 고쳐졌고 경기도에 속하였다. 이후 1414년(태종 14) 과천현(果川縣)과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으로 개칭되었다가, 그 후 2개월 만에 다시 양천현(陽川縣)과 병합되어 금양현(衿陽縣)으로 개칭되었다. 1416년(태종 16) 다시 금천현으로 복구되었고, 1755년(영조 31)에 금천현을 수원부(水原府)에 속하게 하였다. 1795년(정조 19) 금천현감(黔川縣監)을 현령으로 승격시키고, 읍호를 시흥으로 바꿨는데 이는 옛 읍호를 따른 것이다. 이때부터 시흥이란 지명은 거의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쓰이던 ‘금천(衿川)’이란 이름을 대신하여 이 고장의 고유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1797년(정조 21) 시흥현(始興縣)이 수원부에 예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시흥현은 시흥군으로 승격되어 인천부에 속하게 되었다. 1896년(고종 33) 13도제의 실시에 따라 시흥군은 안산군·과천군과 함께 경기도에 예속되었다. 조선시대 시흥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와 무관한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을 위시하여 안산시, 과천시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다.
[조선시대 인천과 안산이었던 시흥시]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는 조선시대 인천부와 안산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소래산과 중림(重林)을 경계로 하며 서쪽으로는 서해에 인접해 있다. 조선 철종 때 제작된 『동여도(東輿圖)』에 나타나 있는 조선 후기 시흥현은 지금의 시흥시보다 동북 방향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금의 시흥시가 자리하는 지역과 인접하고 있을 뿐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지금의 시흥시 영역은 조선 후기 안산군 서북쪽과 인천부 동남쪽 지역이 결합되어 있는 곳에 있다. 즉, 시흥시의 군자·수암권은 안산군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안산군 중 잉화면(仍火面), 초산면(草山面), 마유면(馬遊面), 대월면(大月面) 일대를 가리키며, 소래권은 인천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인천부 중 신현면(新峴面)[신고개면], 전반면(田反面), 황등천면(黃等川面) 일대를 가리킨다.
조선 초에 인주(仁州)로 불리던 인천은 1413년(태종 13) 인천군으로 개칭되었다. 1459년(세조 5) 세조의 비 자성왕비(慈聖王妃)의 외향(外鄕)이라는 이유로 인천군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이후 1688년(숙종 14) 양주(楊州)를 무대로 반역을 주모한 역승(逆僧) 여환(呂還)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697년(숙종 23) 다시 도호부로 환원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 실시에 따라 인천부가 설치되었고, 1896년(고종 33) 경기도 인천부가 되었다.
안산은 고려시대의 안산군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오다가 1663년(현종 4) 안산현(安山縣)으로 강등된다. 그 사유는 온양 고을의 전패(殿牌)를 훔친 생이(生伊)란 자의 태생지가 안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군(郡)으로 환원되었고, 1795년(정조 19)에는 안산이 화성의 속읍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가 실시될 때 안산군은 인천부에 속하였고, 1896년(고종 33)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로 바뀔 때 안산군은 다시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1914년 부·군 통폐합 때 시흥군·안산군·과천군이 통합되어 시흥군이 되었는데, 이때 지금의 시흥시 권역에 해당하는 영역이 시흥군에 포함되게 되었다.
[인천과 안산에 속해 있던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시흥의 지명을 잇다]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를 통해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단행되어 부와 군이 통폐합되었다. 이때 시흥군·안산군·과천군이 통합되어 시흥군이 되었고, 안산군이 폐지되면서 안산군에 속해 있던 군자면과 수암면 지역이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북쪽 지역이었던 인천부의 신현면, 전반면, 황등천면은 부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소래면은 1973년까지 부천군에 속해 있다가 부천군이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에 편입되었고, 이후 1980년 소래읍으로 승격하였다. 이로써 각각 안산군, 인천부, 부천군에 속해 있던 군자면·수암면·소래면이 시흥군에 편입되었고, 지금의 시흥시 권역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시흥군은 9개 면 83리로 편제된 광대한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6년 4월 영등포읍의 영등포리·당산리·양평리와 북면, 1949년 8월 동면의 구로리·대림리·번대방리, 1963년 1월 동면의 시흥리·독산리·가리봉리·봉천리·신림리와 신동면 전 지역이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1973년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1979년 8월 수암면 6개 리와 군자면 7개 리가 반월출장소[1986년 1월 안산시로 승격]로 독립되었다. 1981년에는 광명시, 1989년에는 군포읍이 군포시로, 의왕읍과 동부출장소가 의왕시로 승격되었다. 이때 시흥군에 속해 있던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시로 승격되면서 ‘시흥’이라는 지명이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흥'의 뿌리를 찾는다는 것]
‘시흥’ 하면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이나 시흥행궁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시흥대로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금천구 시흥동에 이르는 대로이다 보니 더욱 그러하다. 시흥이라는 지명의 역사가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경기도 시흥시의 역사를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서부터 찾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지명의 유래를 통해 그 땅의 역사를 유추한다. 하지만 경기도 시흥시에 사는 사람이 ‘시흥’이라는 지명만으로 본인이 사는 지역의 역사를 찾아가려고 한다면 잘못된 주소에 가 있게 된다. 시흥시의 지명 역사와 땅의 역사를 구별해 인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